지난 11일 배틀그라운드 유럽 리그 주관사인 스타래더가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 리그 연기를 알렸다. 누리집 갈무리
크래프톤이 러시아·벨라루스를 포함하는 ‘배틀그라운드’(배그) 동유럽 리그를 무기한 연기했다. 지역예선 격인 이 대회가 멈추면 러시아 팀들은 다음달 예정된 유럽 본선에 참가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우크라이나 정부가 크래프톤 등을 지목해 전세계 게임업계의 ‘대러 제재’를 호소한 이후 나온 조처여서 관심을 모은다. 국내 게임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낸 첫 대응이기도 하다.
16일 <한겨레>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크래프톤과 대회 주관사 스타래더는 지난 11일 배그의 지역별 리그인 ‘펍지 콘티넨털 시리즈(PCS)6 동유럽’의 무기한 연기를 참가팀들에 통보했다. 1인칭 슈팅게임인 배그는 지금까지 7500만장 이상 판매된 크래프톤의 대표작이다. 스타래더는 누리집 공지문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태(우크라이나 침공)를 고려해 피시에스6 동유럽 예선과 지역 플레이오프는 연기됐다. 추후 상황에 대한 소식은 공식 채널을 통해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회는 다음달 열릴 본선인 ‘그랜드 파이널’의 예선 격이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14일 첫 경기가 열렸어야 하지만, 개막을 사흘 앞두고 연기가 결정됐다. 서유럽 등 나머지 유럽지역 예선은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크래프톤 관계자는 <한겨레>에 “정상적인 경기 운영 가능 여부 등의 판단이 필요해 연기를 결정했다. 리그 재개 여부나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예선이 잠정 중단되면서 러시아팀들의 이번 유럽 리그 참가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25만달러(3억1000만원)의 우승 상금 등에 도전할 기회 역시 사라졌다. 이에 온라인 공간에선 일부 러시아 선수들이 자기 이력을 올리며 다른 권역 팀들에 ‘구직’을 벌이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PCS6 동유럽’ 리그 참가를 신청한 팀 명단. 3곳 중 2곳 이상이 러시아 선수로만 이뤄진 팀이었다. 대회 주관사(스타래더) 누리집 갈무리
게임업계에서는 크래프톤이 ‘리그 연기’ 카드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우회적으로 대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러시아인만 특정해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참가선수 대다수가 러시아인인 동유럽 리그를 멈춘 건 사실상 러시아를 겨냥한 조처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동유럽 예선에 등록돼 있던 64개 팀 중 43곳이 러시아, 1곳이 벨라루스 팀이었다.
한 게임사 관계자는 “배그는 이용자들이 전장에서 총을 쏘는 게임이다. 크래프톤으로서는 실제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팀이 총부리를 겨누는 리그를 강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세계적으로는 크래프톤 외에도 여러 글로벌 게임사들이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추세다. 일렉트로닉아츠(EA)가 축구 게임인 ‘피파’ 시리즈에서 러시아 리그·국가대표팀을 삭제한 게 대표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소니·닌텐도 등은 러시아에서 게임 관련 상품이나 게임 내 아이템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 2일(현지시각)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글로벌 게임사들을 향해 트위터에 올린 제재 동참 호소문. 크래프톤은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에 표기했다. 트위터 갈무리
이런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게임업체들에 제재 참여를 호소하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지난 2일(현지시각) 주요 글로벌 게임사들에 트위터 메시지를 띄워 “러시아의 악행에 전세계가 방관하지 않고 (제재에) 참여해주길 촉구한다”며 “러시아에서 귀사의 서비스(판매)를 멈추고 러시아인 이용자를 차단하며, 러시아 지부를 닫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특히 액티비전블리자드와 라이엇게임즈 등 세계적인 게임사와 함께 크래프톤을 콕 찍어 한국어 사명까지 적으며 적극적인 조처를 호소했다.
쓰리엔(3N, 엔씨소프트·넥슨·넷마블) 등 국내 다른 대형 게임사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일절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4일 펄어비스가 국경없는 의사회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위한 의료 지원금 1억원을 기부한 게 전부다. ‘빅 마켓’ 러시아와, 러시아 쪽에 선 중국 시장에서의 매출 타격 우려로 이용자 차단 등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통계조사기관 스타티스타 추산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 게임시장은 230억달러(28조5천억원)에 달했다.
한 대형 게임사 홍보실은 “페도로프 부총리의 메시지는 유관 부서에서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러시아 지역 서비스에서 아직까지 특별한 변화는 없다”고 전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