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지난 26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지난주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7년 만에 폐기하면서, 빅테크 기업들의 이용자 개인정보 보호 책임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구글, 애플, 메타(옛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들은 직원들이 안전하게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근무지 이전·경비 지원 등을
약속했지만, 임신 중지 관련 정보를 온라인에서 얻은 이용자의 개인정보 열람 내역을 사법 당국이 요청하는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24일 엘리자베스 워런을 비롯한 미국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4명은 연방거래위원회(FTC)에
서한을 보내, 애플·구글의 스마트폰 이용자 개인정보 수집·판매 행위에 대해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애플과 구글이 아이오에스(iOS)와 안드로이드 같은 스마트폰 운영체제에 내장된 고유 식별 부호를 통해 이용자 개인정보를 수집·판매하면서 유해한 관행을 고의로 조장해왔다”며 “이들 기업이 수집하는 개인정보가 사법 당국 또는 임신 중지를 시도한 여성을 겨냥한 ‘현상금 사냥꾼’ 손에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디언>은 25일 “빅테크 기업들이 수집·보유한 개인정보는 이미 임신 중지를 엄격하게 금지해 온 주들에서 경구 사후피임약을 복용하거나 임신 중지 시술을 받은 여성들을 기소하는 데에 쓰여 왔다”고 보도했다. 임란 아메드 디지털혐오대응센터 대표는 <가디언>에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자사 서비스가 임신 중지와 관련된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려는 여성을 범죄화하기 위한 무기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고, 우려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6일 ‘임신 중지 방법을 찾고 있나요? 이렇게 하면 디지털 세계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란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매체는 “구글에서 임신 중지 클리닉에 대해 검색하거나, 온라인에서 경구 사후피임약을 주문하거나, 진료실을 방문해 위치 기록을 남기거나, 임신 중지에 대해 고민하는 문자메시지를 누군가에게 보내는 등 온라인에서 여성들이 하는 일련의 행위가 (임신 중지를 시도한 여성이 기소당할 경우) ‘증거의 출처’(sources of evidence)가 될 수 있다”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여성들은 (자신의 임신 상태에 대해) 최소한의 사람에게만 알리고, 종단간 암호화 기능이 있는 메신저 앱을 사용하며, 휴대폰·노트북 등 기기에 잠금 설정을 하지 않은 채 사법 당국에 제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뿐 아니라 임신 중지가 합법화되지 않은 많은 국가에서 온라인 공간은 여성들이 임신 중지 관련 의료 정보를 얻는 가장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해 왔다. 의료기관에서 임신 중지 시술을 받기 어려워 경구 사후피임약을 온라인에서 조달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경구 사후피임약 관련 상담·처방·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기구 ‘위민온웹’이 대표적이다. 한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위민온웹 누리집의 국내 접속을 차단해, 올해 3월 오픈네트워크·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이 이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여성들 사이에선 ‘월경 주기 추적 애플리케이션(앱)에 남긴 건강 정보가 훗날 사법 당국에 유리하게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일면서, 이들 앱을 휴대폰에서 삭제하는 움직임이 번지고 있다. 앞서 지난 5월 국제 디지털 책임성 위원회는 월경 주기 추적 앱들이 개인정보 보호 정책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은 채, 암호화하지 않은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전송하거나 데이터를 공유해 왔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바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용자 우려가 커지자, 월경 주기 추적 앱 ‘내추럴사이클’은 “개인정보를 완전히 익명화해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다른 월경 주기 추적 앱 ‘플로’도 ‘익명 모드’ 기능을 수 주 안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은 여러 법률 전문가를 인용해, “월경 주기 추적 앱들이 수집한 민감 정보를 익명처리 하더라도, 이들 정보를 서로 결합하면 이용자를 충분히 특정해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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