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권아무개(33)씨는 지난 15일 에스케이씨앤씨(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톡 등 카카오 서비스들이 ‘먹통’이 되자 라인 메신저 앱을 10년만에 다시 깔았다. 권씨는 “혹시 급하게 누군가와 연락할 일이 있을까 싶어 재설치했는데, 다음 날 카카오톡을 다시 쓸 수 있게 돼 라인으로 옮겨가진 않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제 친구들이 라인을 많이 안 쓰더라고요. 그리고 카카오톡에 이미 구매해 둔 이모티콘이 많은데 그걸 라인에선 쓸 수 없고요.”
카카오 먹통 사태로 ‘국민 메신저’를 자처하던 카카오톡의 안정성이 의심받으며 라인·텔레그램 등 다른 서비스로 옮겨가는 움직임이 늘고 있지만, 메신저 서비스들의 폐쇄성을 풀지 않으면 다른 어떤 메신저가 새 ‘대세’가 돼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씨 사례처럼 다른 메신저로 옮겨간 이들이 카카오톡으로 속속 되돌아오는 데 대해서도, 대형 메신저 플랫폼이 한 번 공고하게 쌓은 ‘네트워크 효과’를 쉽게 깨기 어려워서라는 분석이 많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다음 메일에서 네이버 메일로, 구글 메일에서 야후 메일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카카오톡에서 라인으로, 또는 텔레그램에서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도록 메신저 서비스 간 상호 운용이 가능한 기술 표준을 만들어 사업자들이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특정 플랫폼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의존도가 과도하게 커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메신저끼리 소통뿐 아니라 데이터 이전이 가능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서치원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생경제위원회)는 “이용자가 원하면 ㄱ메신저에서 자신이 쌓은 대화 내용 등 데이터를 ㄴ서비스로 옮겨갈 수 있게 해야 선택권을 폭넓게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정수 미디어스피어 이사는 “이번 일을 겪고도 이용자들이 라인이나 왓츠앱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건 이미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 이모티콘 등을 더는 쓸 수 없게 되는 등의 ‘락인(lock-in·가두리)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상호운용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메신저를 이용하려면 의사소통뿐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해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메신저처럼 시민 대다수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서비스라면, 이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까지 큰 틀에서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서치원 변호사는 “메신저끼리 데이터 이전을 허용하더라도 ㄱ서비스에서 즐겨 쓰던 기능이 ㄴ서비스에선 구석에 숨어 있다면 이용자 입장에선 그 자체로 불이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애플 아이폰의 경우, 다른 아이폰과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 ‘아이메시지’는 말풍선 색이 파란색이다. 반면 안드로이드 등 다른 운영체제 스마트폰 사용자와 주고받는 일반 메시지 말풍선은 초록색이다. 또 아이폰 이용자끼리는 아이메시지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소통할 수 있지만, 안드로이드폰 이용자는 이 대화방에 낄 수 없다. 휴대폰을 사면 기본으로 깔려 있는 문자 메시지 앱인데도, 기종에 따라 소통 가능한 대상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구글 등 경쟁 사업자들은 이런 구분짓기가 특정 사업자가 만든 생태계로의 락인 효과를 더 심화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또래 집단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청소년들에겐 구분짓기의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유럽에선 메신저 상호운용성 논의가 이미 활발하다. 유럽연합(EU) 이사회가 지난 3월 도입에 합의한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에 따르면, 내년부터는 페이스북 메신저나 왓츠앱 등 대형 메신저들은 소규모 메신저들이 요청하면 이들과 상호 운용이 가능하도록 서비스를 개방해야 한다.
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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