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공백 위기론이 일단 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은 미-중 ‘기술패권 전쟁’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격변하는 상황에 삼성 총수의 부재로 ‘케이(K)-반도체’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로 풀이된다. 재벌 총수들의 사법처리 때마다 제기되는 ‘총수 공백 위기론’이 어김없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삼성 투자 시계 빨라질 듯 오는 13일 이재용 부회장 출소 이후 삼성의 투자 시계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투자 규모도 증액될 여지가 있다. 이 부회장이 수감 전후 발표한 여러 투자 계획을 속도감 있게 조정·집행하면서 총수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삼성그룹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정부의 ‘케이-반도체 벨트 전략’과 관련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71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같은 달 한-미 정상회담 직후 미국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투자 계획을 내놨다. 모두 정부의 산업·외교 정책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경영 계획인 터라 삼성의 계획 실천은 현 정부의 성과로 나타나는 구조다.
파격적 수준의 인수합병에 삼성이 전격 뛰어들 여지도 있다. 올해 1분기(1~3월) 기준 현금성 자산이 약 128조원에 이를 정도로 삼성전자가 쥐고 있는 실탄은 넉넉하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2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3년 내 의미 있는 인수합병을 하겠다”며 대규모 인수합병에 나설 뜻을 내비친 바 있다.
■ 새 어젠다 꺼낼까 재계 일각에선 이 부회장이 새로운 경영 어젠다나 비전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투자 조정이나 규모 확대는 식상한 국면 전환법이라는 이유에서다. 전례도 있다.
과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고 이건희 회장은 대통령 특별사면 이후 경영에 복귀하면서 새로운 경영 가치와 위기론을 동시에 제기했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한 그는, 그해 가을 ‘젊은 조직론’을 꺼내 들며 삼성그룹의 고위 경영진 평균 연령을 끌어내리는 한편 발탁 인사를 대폭 강화했다. 그의 아들인 당시 이재용 부사장(최고운영책임자)의 사장 승진을 합리화하기 위해 깐 포석이란 해석도 있었지만, 이 회장의 젊은 조직론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또 태양전지, 바이오·제약, 발광다이오드(LED) 등 5대 신수종 사업 발굴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중국의 빠른 추격과 미·일의 선진적 산업 재편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던 터라 삼성이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앞만 보고 가자”고 말했다.
■ 당분간 몸 낮춘 행보 예상도 재계의 이런 예상과는 달리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가석방 신분인 터라 정부가 취업 제한 조처를 풀어주지 않으면 법적 제약이 있고, 불법승계 의혹 등과 관련된 재판이 진행 중인 것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또 총수 공백 위기론과 달리 그의 수감 기간에도 삼성전자가 연이어 깜짝 실적(어닝서프라이즈)을 내고 있는 점도 이 부회장의 ‘몸 낮춘 행보’ 예상이 나오는 배경 중 하나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잇따른 사법 리스크로) 삼성 안에서 입지가 좁아진 이 부회장에게 필요한 것은 자숙의 시간”이라며 “시민사회와 여러 전문가가 계속 이 부회장의 행보를 주시하는 만큼 성급한 복귀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에 대한 여론을 외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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