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6일 삼성전자와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 12곳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산업용 전기요금을 연내 조정하겠다던 산업통상자원부가 “속도 조절을 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전력 다소비 기업들의 반발이 터져 나오자, 국정 과제로 추진해온 산업용 전기요금 조정 방침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정부가 기업들의 반발에 밀려 ‘에너지전환’ 핵심 정책 수단을 쓸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지난 16일 세종시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산업용 경부하 요금에 대한 업계 우려를 충분히 들었고, 그런 우려를 반영해 이 문제는 속도 조절하도록 하겠다”며 “연내에 (요금 조정을)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산업용 경부하 요금이란 전력 소비가 적어 부하가 약한 밤 11시에서 오전 9시에 산업계에만 적용되는 전기요금이다. 발전 업계에서는 일부 산업용 경부하 요금은 발전원가보다 싼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심야 전력 과소비를 부르는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의 연내 개편을 공언해왔다. 경부하 요금은 올리고, 대신 중간부하와 최대부하 요금을 낮춰 기업 부담은 최소화하되 비정상적 소비구조는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김종갑 한국전력 사장도 지난달 26일 “잘못된 소비행태는 고쳐야 한다. 심야 전기요금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백 장관이 느닷없이 ‘속도 조절’을 꺼내 든 것은 최근 고용·수출 등의 경제 지표가 나빠지자 정부가 기업들에 손을 내밀고 있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백 장관은 속도 조절을 언급한 날 오전 주요 업종의 대기업 12곳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도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기업들의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한 참석자는 “백 장관이 기업들의 얘기를 들은 뒤 산업용 전기 요금을 어떻게 하겠다고 못박아 말하진 않았다”며 “다만, 앞으로 기업들 쪽 얘기를 최대한 듣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전했다. 해당 간담회에서 기업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비롯한 규제 완화와 탄력적근로시간 제도 확대 등도 요구했다.
산업용 전기요금 조정 ‘속도 조절’의 등장은 곧이어 에너지 전환 정책 후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이미 상당히 많은 기업이 심야 전기요금 조정을 염두에 두고 신재생 에너지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나 심야 전력 소비방식 개선 등을 검토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정부가 이렇게 갈팡질팡하면 시장이 에너지 전환을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전력 소비행태를 고치기 위해 산업용 심야 전기요금은 꼭 조정해야 한다”며 “정책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보호무역주의 확대와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기업 활동 여건이 이전보다 어려워진 터라 전기요금 조정 시점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부는 향후 산업용 경부하 요금조정이 업종별로 기업들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지 등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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