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공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악수하는 모습. 화성/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1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2019 기업인과의 대화’가 열렸을 때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기업인들의 경내 산책 때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함께 걷고 있는 문 대통령과 이 부회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파운드리라고, 위탁만….” 이 부회장은 산책길에 문 대통령에게 “저희 공장이나 연구소에 한번 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삼성이 대규모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는다면 언제든지 가죠”라고 답했다.
청와대와 삼성의 ‘시스템반도체’를 고리로 한 ‘밀월’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소득주도성장 및 혁신성장에서 재벌 대기업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전략으로 돌아섰다. 이 ‘방향 전환’의 한가운데에 노 실장이 있다는 풀이가 나온다. 노 실장은 주요 대기업과 가깝고 ‘친시장주의자’로 통해왔다.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투자 발표(4월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뒤 첫 삼성전자 국내 공장 방문(4월30일),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 합동 시스템반도체 정부종합대책 발표 등 일련의 ‘이벤트’는 지난 1월 노 실장 취임 석달 만에 이뤄졌다. 겉보기엔 급작스러운 듯하나, 실제로는 정부와 삼성전자 간 시스템반도체 ‘공동 기획’이 추진돼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시스템반도체 지원 대책을 설명할 때 ‘해당 기업들과 언제부터 논의했느냐’는 물음에 “많은 협력 채널이 가동돼왔다.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 대책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19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 출신인 노 실장은 정치권에서 ‘반도체맨’으로 통한다. 10여년 전 초선 의원 시절부터 정부의 과감한 반도체업계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2008년 9월 ‘시스템반도체 미래형 융·복합 산업 발전 방안’ 토론회와 함께 창립한 ‘신성장산업 포럼’이 그의 주요 무대였다. 노 실장은 2015년까지 이 포럼 대표를 맡으며 산업계와 가까이 지냈고 ‘반도체의 날’ 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엔 주중대사로서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공장 2라인 기공식에 참석해 격려했다. 이번 문 대통령의 삼성공장 방문과 정부 차원의 시스템반도체 대책 수립은 노 실장의 오랜 주장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앞서 주중대사였던 노 실장을 인선할 때부터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정부의 대기업 지원 강화를 주창해온 노 비서실장이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보수진영의 강한 반발과 경제지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산업 혁신성장’ 정책의 한계로부터 문 대통령을 지켜줄 ‘구원투수’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로 평가되는 김수현 전 사회수석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배치한 것도 청와대의 ‘지지율 하락’에 대한 불안이 투영된 것이란 평가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진두지휘’하는 경제정책을 두고 정치권에서도 불안한 시선이 나온다. 한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대통령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는 노 실장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꽉 쥐고 있다”며 “눈에 띄는 방향 전환 시그널이 더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 소장인 김우찬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인터넷전문은행법 통과 때부터 정부의 경제기조가 바뀌고 있었다”며 “중소기업·벤처를 육성하는 등의 산업 생태계 체질 개선은 쉽지 않고 경기 하강 국면은 계속 이어지자 재벌에 의지하는 쉬운 방법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하얀 송경화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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