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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수십개 색상·레이스·터틀넥…내복 ‘패션의 주연’ 되다

등록 2019-12-12 04:59수정 2019-12-12 09:02

빨간내복, 한때 첫 월급 효도선물
옷맵시 중시 젊은이는 잘 안입어
외환위기땐 ‘내복 입기’ 절약 운동

2000년대초 발열내의 등장하며 진화
저렴한 가격·디자인 20·30대 포섭
터틀넥 등 스타일에 21개 다양한 색

방한 목적 조연 아닌 단독 ‘주연’으로
내의-외의 등 옷 경계 모호 영향도
속옷시장, 여성복업체까지 가세 치열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촐하고 계획성 있게 새해 맞이 채비. 빨간 내복을 입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어 빨간 내복을 사드리는 것도 노인을 기분 좋게 하는 방법.”(1976년 12월15일 <경향신문>)

1970~80년대 연말연시 신문에는 빨간 내복이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 건강을 기원하며 빨간 내복을 사는 풍습이 유행처럼 퍼졌다. 값이 비싸 한때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내복은 점차 서민층을 상징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새빨간 내복을 입고 입 벌리며 잠든 예쁜 아이. 한손에 누런 월급봉투 한손에 따뜻한 풀빵 가득.” 2002년 가수 이문세(60)가 유년의 추억을 담아낸 14집 앨범 제목도 ‘빨간 내복’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 개봉을 계기로 빨간 내복이 다시 화제다. 주인공 엘사가 입은 자주색 브이넥 드레스가 빨간 내복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속옷업체 비와이씨(BYC)는 영화관 씨제이 씨지브이(CJ CGV)와 손잡고 관람객 일부에게 빨간 내복을 증정하는 ‘내복왕국’ 이벤트까지 마련했다. 촌스럽게 여겨지던 빨간 내복이 ‘겨울왕국발 복고’ 열풍을 탄 모양새다. 내복은 보온성과 심미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며 변신해왔다.

■“더 가볍게, 더 따뜻하게”

옷맵시를 중시하는 20~30대에게 내복은 마지막 선택지에 가까웠다. 이런 내복이 생활필수품으로 재소환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 가정과 기업에서 너나없이 난방비 절감에 나서면서 ‘내복 입기 운동’도 일었다. 세기말의 혹독한 추위에도 매무새를 놓치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치열한 고민은 내복의 ‘진화’로 이어졌다. 면 소재 내복보다 가볍지만 스타킹보다는 두꺼운 타이츠가 처음 소개돼 불티나게 팔렸고, 몸에 달라붙는 효과를 노린 끝에 내복 상의와 팬티를 이어 붙인 독특한 디자인의 의상까지 시판됐다.

‘패션’보다는 ‘방한복’에 가까웠던 내복 시장의 지형을 흔든 것은 기능성 내복이다. 2006년 국내에 출시된 유니클로의 ‘히트텍’이 이른바 ‘발열내의’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지만 발열내의가 처음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보다 최소 4~5년 전이다. 쌍방울, 좋은사람들, 비와이씨 등 국내업체들은 2002년부터 ‘발열 기능을 가진 속옷’을 홍보해왔다. 섬유가 땀과 수증기를 흡착하는 과정에서 열을 내거나, 공기의 적외선을 흡수해 보온성을 높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내복은 ‘효도선물’이라는 인식이 굳어진 터라 젊은 세대까지 퍼지지는 못했다.

20~30대 소비자가 많이 찾는 에스피에이(SPA·제조-유통 일괄형 의류) 브랜드와 아웃도어 업체가 내의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히트텍은 전세계에서 10억장 넘게 팔렸고, ‘웜히트’(스파오·2009년, ‘웜테크’로 변경), ‘웜테크’(코오롱스포츠·2010년), ‘히트필’(이마트·2012년), ‘온에어’(탑텐·2013년) 등이 잇달아 나오면서 ‘발열내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속옷 시장은 2조원 규모인데 그중 발열내의는 7천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저렴한 가격과 몸에 달라붙는 디자인으로 매무새를 중시하는 20~30대를 포섭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발열 효과를 두고는 논란이 분분하다. 2015년 와이더블유시에이(YWCA)는 자체 조사를 통해 “(주변의) 기능성 발현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발열 기능이 착용 시 보온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피부가 건조하거나 활동성이 적은 사람에게는 효과가 미미할 수 있다”고 짚었다. 같은 해 <한국의류산업학회지>에 실린 ‘발열내복이라 광고되는 시판 기능성 보온내복의 써멀 마네킹과 인체 착용 실험을 통한 체온조절 성능 평가’ 연구논문(이효현·이영란·김지은·김시연·이주영)에서도 “기존 내복과 기능성 보온내복 원단의 물리적 특성 차이들은 착용자가 체감할 정도의 체온조절 성능 차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지적됐다. 남영비비안 관계자는 “시험평가를 통해 발열 기능을 검증하지만, 효능은 개인 차이가 있는 만큼 최근 들어서 ‘발열내의’ 문구를 정면에 내세운 마케팅은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내복, 주연이 되다

‘팬티나 러닝셔츠, 브래지어 따위의 기본 속옷 위에 껴입는 방한용 옷’(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내복의 전통적인 정의는 이제 무색해졌다. 내복이 방한 목적의 ‘조연’이 아니라 단독으로 착용하는 ‘주연’ 자리를 꿰차면서다.

스파오는 올해 웜테크 주력 제품으로 터틀넥 디자인을 앞세우고 김칠두(64)씨를 모델로 기용했다. 내복 하나만 입어도 보온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40~50대 소비자로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다. 검정과 흰색 등 무채색 위주던 히트텍은 21가지 색상으로 확장됐고, 길이도 반소매·7부·9부 등 가짓수가 많아졌다. 터틀넥 등 겉으로 드러나는 속옷을 강조하기는 ‘탑텐’의 온에어와 비와이씨의 보디히트도 마찬가지다. 여성복 ‘앤클라인’은 레이스로 팔 부분을 장식해 블라우스로 활용할 수 있는 속옷을 선보였고, 신세계 인터내셔날의 ‘자주온’은 캐시미어보다 얇은 원사를 써서 얇은 니트처럼 입을 수 있는 내복을 내놓았다.

실용성과 활동성을 중시하는 소비 흐름을 반영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비와이씨 관계자는 “롱패딩 등 외투가 두툼해지면서 안에 입는 옷은 간소화하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며 “외투 안에 발열내의 하나만 입거나 니트, 경량패딩 등을 걸칠 수 있도록 두께와 보온성을 강화하는 추세다”고 했다. 겨울 내복에만 국한된 얘기도 아니다. 유니클로 관계자는 “여름철 브라톱이 장착된 원피스 매출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인다”며 “실용성을 중시하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내복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원룩’에 대한 선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옷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도 한 가지 요인으로 꼽힌다. 강지영 남영비비안 디자인팀장은 “내의와 외의, 잠옷과 일상복, 평상복과 정장 등 용도에 따른 옷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실내복은 화려하게, 외출복은 캐주얼하게 바뀌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속옷이나 운동복으로 쓰였던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되면서 애슬레저(athleisure·운동+여가)의 대표로 꼽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복은 점차 주연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그 수혜를 속옷업체들이 고스란히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성복 업체와 유통업체 자체브랜드가 줄줄이 발을 담그면서 경쟁은 격화하고 있다. 국내 토종업체들은 최근 몇년간 매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감소했고 남영비비안은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한 속옷업체 관계자는 “내복 시장 성장이 에스피에이 등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일부 속옷업체의 대응이 늦은 측면이 있었다”며 “젊은 소비층 수요를 회복하는 게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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