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내놓았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1위를 달성하기 위해 연구개발(R&D) 및 생산기술 확충에 모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글로벌 1위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여전히 성과가 미흡하다는 판단에서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사람들의 삶 속에 조금씩 스며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 투자에 나서는 배경이다.
삼성전자의 이런 움직임은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의지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해 3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내놓기 바란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건 문 대통령 발언 한 달 뒤다. 정부와의 교감 속에서 이뤄진 발표였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이처럼 민관이 함께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힘을 모으는 것은 시스템 반도체가 메모리 반도체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강성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정보통신기술(ICT)창의연구소장은 “시스템 반도체가 산업화될 때 고용 창출 등 아주 큰 파급효과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메모리 반도체는 가격 부침이 심하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안정적”이라며 “중소기업 육성이나 고용 창출 부분에서도 메모리 반도체보다 시스템 반도체의 기여율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반도체 비전 2030’의 계획대로 투자가 이뤄지면 간접 고용유발 효과가 42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을 내놨다.
■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성과는?
그렇다면 비전을 발표한 지 1년이 흐른 현재, 삼성의 시스템 반도체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을까. 큰 흐름만 놓고 보면 지난 1년 동안 두드러진 실적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29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올해 1분기 실적을 보면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시스템 반도체 매출은 4조5천억원이다. 약 10년 동안 분기별로 2조~4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주로 3조원대 초중반에 머물던 과거와 달리 지난해 2분기 이후부터 3조원 후반대에서 4조원을 넘나드는 매출을 이어온 건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라 평가할 만하다.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는 크게 두 분야로 나눠진다. 팹리스(칩설계) 기업한테 수주를 받아 칩을 생산하는 파운드리 부문과 직접 칩설계를 하는 시스템엘에스아이(LSI·고밀도집적회로) 부문이다. 시스템엘에스아이 부문에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엑시노스’ 시리즈가 삼성전자가 전략적으로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는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이 두 부문에서 각각 글로벌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파운드리 부문 1위 업체는 대만의 티에스엠시(TSMC),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1위 업체는 미국의 퀄컴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성적만을 놓고 보면 각 분야 1위 탈환까진 아직 요원해 보인다. 지난 1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가 발표한 올해 1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티에스엠시가 54.1%로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15.9%로 2위지만 1위와 격차가 크다. 더구나 지난해 4반기에 비해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티에스엠시의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52.7%에서 올해 1분기엔 1.4%포인트 높아졌으나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17.8%에서 1.9%포인트 낮아졌다.
티에스엠시는 기술력에서도 삼성전자를 앞서고 있다. 파운드리 업체 중 7나노 이하 미세공정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티에스엠시와 삼성전자뿐이다. 그러나 극자외선(EUV) 초미세 공정이 필요한 5나노 경쟁에서는 삼성전자가 뒤지고 있다. 티에스엠시가 이미 지난 4월 세계 최초로 5나노 공정 양산에 들어간 데 반해,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 5나노 공정 제품 설계를 완료한 뒤 아직 제품 양산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 2분기부터 5나노 기반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전략 스마트폰에 퀄컴 칩 탑재
삼성전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사업에서도 시장 점유율을 조금씩 높여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1위와의 격차는 크다. 최근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가 낸 분기별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세계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시장 점유율은 2018년 11.8%에서 2019년 14.1%로 올라 애플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퀄컴이 33.4%로 1위, 미디어텍이 24.6%로 2위를 기록했다. 애플은 13.1%로 2018년 시장 점유율 3위에서 지난해 4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삼성전자는 2018년 11.8%에서 2.3%포인트 늘어났다.
하지만 1위인 퀄컴의 기술력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출시한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에스(S)20 국내용 제품에 삼성전자가 직접 설계한 엑시노스 대신 퀄컴의 ‘스냅드래곤 865’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에도 판매 지역에 따라 탑재되는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가 달랐으나 국내용 전략 스마트폰에는 항상 엑시노스를 탑재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용 제품에도 퀄컴의 제품이 들어간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성능이 떨어지는 칩을 채택하면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사 제품보다는 품질이 우수한 칩을 탑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반도체 종합회사의 기회요인과 위험요인
이처럼 삼성전자가 모바일부터 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 칩설계까지 하는 종합 반도체 회사라는 점은 삼성전자에 위험요인이면서 동시에 기회요인이다. 티에스엠시는 팹리스업체로부터 받은 칩설계도를 가지고 칩을 만들기만 하는 파운드리 전문 회사이고 퀄컴은 칩을 만드는 공장이 없는 칩설계 전문회사(팹리스)다. 이에 반해 삼성전자는 자사가 설계한 칩을 자사 파운드리에 맡기고, 자사가 생산한 칩을 자사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다. 내부 매출 요인이 그만큼 큰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내부 매출은 19.6%다. 2018년엔 24.9%, 2017년에는 21%가 내부 매출이었다. 삼성전자의 이런 사업구조는 시스템 반도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업구조는 동시에 위험 요인도 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사업구조가 나름의 강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성장하는데는 도리어 방해가 될 수도 있다”며 “내부 매출에 안주해서는 글로벌 1위를 달성할 수 없다. 이미 내부 매출을 대부분 반영된 상황이라 여기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직접 칩설계에 나서는 것도 파운드리업체로서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직접 칩을 만들기 때문에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수주를 맡기는 팹리스업체가 기술유출 가능성에 대해 고려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시스템엘에스아이 부문에 통합돼 있던 파운드리 부문을 2017년에 분리한 것도 이런 우려를 고려한 것이다.
■ 코로나19는 악재, AP 성능 개선 전망도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지 1년. 삼성전자는 남은 9년 동안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를 달성할 수 있을까. 현재 삼성전자 앞에는 여러 변수가 놓여 있다. 그중에서도 코로나19는 가장 큰 악재다. 1분기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실적은 사상 두번째로 높았지만, 코로나19로 모바일 수요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2분기 전망은 밝지 않다. 신동호 삼성전자 시스템엘에스아이 부문 전무는 지난달 29일 콘퍼런스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제조사 생산차질, 소비심리 둔화 영향으로 전반적인 수요 위축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긍정적인 전망도 있다. 케이티비(KTB)투자증권의 김양재 애널리스트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시장 점유율 확대를 전망하며 “퀄컴의 가격 인상으로 스마트폰 업체의 원가 부담이 커져 대안으로 삼성전자의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채택을 늘릴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며 “향후 엑시노스 성능 개선도 기대되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