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모든 기업은 협력업체와 하청업체까지 전체 공급망 가치사슬에 걸쳐 노동 인권, 환경, 작업장 안전 등을 확인·보고·개선하는 ‘상당한 주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벌금을 물거나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된 가운데, 최근 유럽연합(EU)이 기업에 인권·환경·지배구조 관련 위험 예방 및 개선 의무를 부과하는 입법 권고안을 채택하는 등 공정경제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 사업을 벌이는 각국 기업들은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엇갈린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각국 기업에 공급망 납품 전 과정에서 인권·환경 실사 의무를 부과하는 ‘상당한 주의 의무’(due diligence) 관련 입법 권고안을 채택한 것과 관련해 지난 8일까지 역내 모든 기업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유럽의회는 다음달 전체회의를 열어 이 권고안에 대한 투표에 들어간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의회의 권고안을 반영한 법률(지속가능한 기업지배구조) 초안을 올 2분기에 제출할 방침이다. 이 권고안은 유럽에서 비즈니스 활동을 하는 모든 기업에게 협력업체와 하청업체까지 포괄해 인권·환경 침해 여부를 감시하고 조사 확인, 예방·개선하는 의무를 지우고 있다. 기업 본체뿐 아니라 사업상 거래 관계에 있는 납품 및 재하청기업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유럽연합 쪽은 “이번 입법안이 중국 등지의 강제노동 관련 상품교역 차단에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적용 대상 기업은 민간뿐 아니라 국영 기업과 금융 부문까지 포함한다. 권고안 초안을 마련한 라라 울터스 유럽연합 의원은 “공급망 사슬에서 인권과 환경에 해를 끼치는 기업 행동에 책임을 물리기 위한 유럽 공통규범”이라며 “예컨대 유럽 기업에 납품하는 기업이 유럽 바깥에서 바다에 기름을 방류한 사실이 적발됐을 경우 유럽 기업에 ‘상당한 주의 의무 노력에서 실패한 책임’을 지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 공급망 의무 도입과 관련해 유럽 산업계는 다소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최대 업계 단체인 ‘비즈니스유럽’은 “유럽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초래한다”며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달리 나이키·유니레버·코카콜라·피앤지(P&G)·네슬레 등이 소속된 유럽브랜드협회(AIM)는 의무 도입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전 세계 각국에 하청 제조공장을 갖춘 다국적 기업일수록 찬성하는 셈이다. 이 협회는 “우리 협회는 유럽의회의 인권·환경 주의 의무를 앞장서 지지한다. 소비재 브랜드들은 전 세계에 걸쳐 책임있는 비즈니스 활동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실제로 이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지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 기업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유럽에 진출한 300여개 한국 기업을 대표하는 유럽한국기업연합회는 유럽집행위에 “새로운 비관세장벽으로 작용하게 될 우려가 있다”며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독려를 통해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글로벌가치사슬(GVC)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원청 기업이 모든 납품업체의 규정 준수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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