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고급 차의 특징은 높은 배기량이었다. 넉넉한 힘과 정숙성이 차의 급을 갈랐다. 형(현대차 그랜저) 잡고 싶은 동생(기아 K8)이 앞세운 강점도 힘이다. 기아는 그랜저보다 더 큰 엔진을 가진 ‘K8 3.5 가솔린’ 모델을 지난달 출시했다.
지난 22일 배기량 3470cc 6기통 엔진을 얹은 K8 3.5 가솔린(휘발유) 승용차를 시승했다. 모든 편의 장비를 갖춘 풀옵션 기준 찻값이 5천만원에 이르는 준대형 차량이다. 시승 차를 타고 경기도 김포신도시에서 이케아 고양점을 거쳐, 파주 애룡저수지까지 왕복 200km가량을 달렸다.
첫인상은 일단 ‘크다’는 거다. 그랜저보다 앞뒤 길이(전장)가 2.5cm 길고, 좌우 길이(전폭)는 같다. 게다가 차 앞쪽의 엔진 덮개(보닛)가 아래로 가파르게 떨어진다. 운전석에서 차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시동을 걸어도 실내는 조용하다. 저속에서 가속 페달을 밟을 때 들리는 엔진음이 이 차가 내연기관 차량임을 알려준다. 가죽 시트는 적당히 단단하고, 차체와 바퀴를 연결하는 현가장치(서스펜션)는 도로 표면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잘 흡수한다. 방지턱 넘을 때도 승차감이 꽤 부드럽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 정지 상태에서 가속 페달을 꾹 밟자 타이어가 공회전(휠 스핀) 후 차가 앞으로 달려 나간다. 가속 때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엔진 속 커다란 원통형 실린더 6개에 꽉 채워 넣은 공기가 연료와 함께 타며 만드는 넉넉한 힘과 꾸준한 가속력은 배기량 큰 엔진 만의 장점이다.
고속에서 차선을 바꾸거나 코너를 돌 때 조향감도 나쁘지 않다. 다만 가속 페달을 깊게 밟을 때 들리는 날카로운 엔진 소리를 싫어하는 운전자도 있겠다.
아쉬운 것은 운전석이 아니라 차의 뒤쪽이었다. 뒷좌석에 앉았을 때 무릎에서 앞좌석 등받이까진 주먹 3개가 들어갈 정도의 여유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위쪽은 키가 180cm가 되지 않는 기자도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았다. 차체 천장에서 뒤쪽 트렁크를 향해 낮게 흘러내리는 날렵한 외관 때문에 정작 실내 공간이 좁아진 것으로 보인다.
뒷좌석에 탄 지인은 고급 수입차와 같은 시트의 안락함을 느끼기 어렵고, 도로 요철과 굴곡의 충격도 앞좌석보다 많이 전달되는 것 같다고 했다. 뒤쪽 트렁크에는 골프 가방을 2개 이상 넣기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달리는 맛이 있다. 일반 도로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 가속을 자주 했는데도 연비는 10㎞/ℓ를 넘겼다. 반면 경쟁 상대인 그랜저는 2019년 부분 변경(페이스 리프트)된 구형 차량이다. 개인적으로 ‘하차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차보다 비싸고 공간이 협소한 수입차를 선호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다.
소비자의 고민은 다른 데 있을 것 같다. 이 가격이면 경제성 높은 하이브리드나 보조금 얹은 전기차를 살 수 있다. 배기량이 크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엔진에서 나오는 연소 가스도 많다는 이야기다. 커다란 엔진이 제공하는 주행 질감 등 장점이 여전히 많지만 ‘고배기량=고급차’라는 공식은 점차 과거의 기준이 되고 있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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