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섬유업체 ㅎ사의 자금팀에서 일하는 허아무개(31)씨는 지난주부터 시작된 인사평가 작업에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결국 소속팀의 사업성과가 자기 성적표까지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급심사 대상인 선배 팀원에게 팀장이 후한 평점을 몰아주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허씨는 “팀장이 개인별로 주는 점수도 업적이나 능력보다는 평소에 어떤 인상을 남겼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한 재벌기업 계열사의 인사담당인 홍아무개 부장은 “연초에 개인 목표를 자기 능력의 80~90% 수준으로 정하는 게 인사평가를 잘 받는 비법”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5년여 전에 도입된 다면평가 제도에 대해서도 “섬세한 평가표를 만들건 백지 한 장 주고 써오라고 하건 결과는 똑같다”며 “인사평가의 실효성 논란은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문화와 구성원들의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평가했다.
“인사평가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다름 아닌 국내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충고다. 8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기업 인사담당자 341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아직도 대부분 대기업들이 인사평가를 할때 상급자에게 하급자에게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수직평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사평가 방식을 보면, 10곳 가운데 거의 7곳꼴(66.6%)로 ‘상사에 의한 수직평가만 한다’고 대답했다. 이어 ‘부하·동료 포함한 다면평가’(12.6%), ‘조직과 개인의 목표를 관련시켜 평가하는 목표관리 반영’(9.7%), ‘자기 고과 반영’(6.2%) 등의 순이었다. 특히 국내 대기업일수록 수직평가만 한다는 응답(72.5%)이 높아, 외국계 기업(34.7%)과 대조를 보였다. 인사평가를 승진·승격 심사에 반영한다는 응답률은 59.9%였고, 평가 결과에 따른 차등승진 제도(29.3%)나 능력 우수자를 몇 단계씩 승격시키는 발탁승진 제도(25.5%)를 도입한 곳도 많았다.
하지만 평가를 받는 직원들 사이에 평가방식과 결과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낮았다. ‘형식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이 50.1%를 차지한 반면에, ‘능력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20.5%에 그쳤다. ‘직원간 경쟁이 치열해진다’와 ‘부서 내 협력의식과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응답은 각각 17.3%와 10.3%로 집계됐다. 인사담당자들은 현재 인사평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평가와 능력개발의 연계성 부족(22.3%) △일보다 사람 중심의 평가(15.8%) △면담 무시나 목표 미설정 등 목표관리 제도의 유명무실화(14.4%) △온정주의(12.6%) 등을 꼽았다.
인사담당자들은 상사의 일방적 평가에 의존하면서 개인보다는 팀 전체 평가에 의존하는 것이 ‘한국적 특색’이라고 설명한다. 경영진들이 직원들의 능력개발과 중장기 조직역량 강화보다는 목표 대비 성과 달성 여부에 초점을 맞춰 성적표를 매기는 것도 국내 대기업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외국계 유통회사의 인사담당 이사는 “권투선수가 한 라운드를 뛰면서 처음 1~2분은 탐색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1분에 힘을 쏟으면 점수를 잘 따는 것처럼 대기업이건 외국계 기업이건 연말에 최대한 성과를 올려 상급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으려는 직장인들이 많다”고 전했다.
임주환 하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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