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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직장·취업

“사람을 이렇게 쓰고 버리는구나…매일 울었다”

등록 2015-02-22 10:35수정 2015-02-23 13:02

[경제의 창]

케이블방송사 계약직인 ㄱ(34)씨는 올해 4월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두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의심치 않았는데 최근 인사이동으로 자신과 업무가 겹치는 사람이 같은 부서로 오면서 부쩍 신경이 쓰인다. 방송제작 일을 하는 그는 야근이 잦다. 퇴근시간은 늘 들쑥날쑥이다. 하지만 출근시간은 오전 9시 고정이다. 야근 다음날 출근시간이 탄력적으로 조정되던 이전 회사들과 달리 지금 회사는 새벽 4시에 일이 끝나도 9시까지 ‘칼출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휴일수당·야근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다. 급여명세서의 고정급 이외에 수당은 일절 없다. 심지어 동의한 적 없음에도 급여계좌에서는 매월 기부금 명목으로 5000원씩 빠져나가고 있다. 이 모든 부당함에 그는 입 한번 뻥긋해보지 못했다. “일방적 해고를 통보받고 나가는 이들을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불안한 고용에 답답한 기업문화까지 더해져 그는 이직을 고민중이다.

심야근무뒤 칼출근 등 장시간 노동
초과근무수당없이 툭하면 임금체불 

성희롱·폭언·괴롭힘당해도
정규직 전환 걸려있어 쉬쉬

문화예술·패션·IT 소기업이 많아
청년유니온, 보고서 내고 전면전

7월에 ‘청년착취대상’ 선정 추진
블랙기업 법안 마련도 고민중

지난해 11월9일 민주노총과 함께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한 청년유니온에 접수된 ‘블랙기업’ 사례다. 일본에서 건너온 표현인 ‘블랙기업’은 청년노동자들에게 비합리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을 가리킨다. ‘정규직 희망고문’ ‘저임금’ ‘인격모독’ ‘수당 없는 야근’ ‘계약직 차별’ ‘장시간 노동’ 등을 일삼는 기업들이다. 최근 정규직 채용과정서 구직자 전원을 불합격 처분해 논란을 빚은 위메프, ‘열정페이’만 주고 노동을 착취한 디자이너 이상봉의 회사를 블랙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운동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블랙기업 고발 사이트를 열어 청년들의 사례를 모았다. 석달간 63건의 고발이 접수됐다. 업무 부적응이란 명목의 부당해고, 임금체불, 인격모독 등 청년들을 울리는 블랙기업의 수법은 아주 악랄하고 다양했다. 특히 장시간 노동, 고용 불안정, 직장내 괴롭힘이 주된 유형으로 나타났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고발 사례와 청년들의 일자리 설문조사 등의 분석을 거쳐 ‘청년의 노동경험에 근거한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개발 연구보고서’(블랙기업 보고서)를 냈다. 서울시 청년허브의 연구용역으로 만든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적된 문제 중 가장 많은 유형은 장시간 노동(69.8%)이었다. 이어 연장수당 미지급(36.5%), 임금 체불(31.7%), 폭언(23.8%) 등이 뒤따랐다.

블랙기업으로 신고된 업체들은 주로 문화예술, 패션, 정보기술(IT) 분야의 소기업이 많았다. 대기업으로는 통신업체나 통신업체와의 간접고용 형태 업체들이 눈에 띄었다. 소기업일수록, 청년노동자가 어릴수록 블랙기업의 폭력은 두드러졌다. 기본적인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아 청년노동자들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픽 이임정 기자 imjung@hani.co.kr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공연기획사에서 일했던 ㄴ(27)씨의 주된 업무는 사무실 청소, 우편물 정리, 포스터 배포, 공연장 앞 티켓 확인 등의 잔일이었다. 공연기획 일을 배우러 들어갔지만 허드렛일을 더 많이 했다. 정직원이 5명인 회사는 인턴 월급으로 90만원을 줬다. 인턴이 끝나면 정직원으로 채용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근로계약서도 안 썼다. 정규직 될 날만 기다렸는데 인턴 3개월을 꽉 채우자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해고 사유는 “너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다”였다. 어이없는 해고 통보를 받고 그는 몇날을 울었다. “사람을 이렇게 쓰고 버리는구나 싶어” 억울하고 서러웠다.

해고를 당하고 나니 알 수 없던 일련의 일들이 이해가 갔다. 직원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를 왕따시켰다. 밥을 먹을 때도, 주요 업무를 볼 때도 그를 배제했다. 사무실 벽 달력에는 3개월마다 각기 다른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다 간 인턴들의 이니셜이었다. ㄴ씨는 “5인 이상 직원을 두면 세금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회사가 직원을 늘리지 않으려 인턴을 3개월마다 쓰고 버렸다”며 “인턴은 어차피 나갈 사람이니 기존 직원들이 아예 정을 주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ㄴ씨는 회사를 나온 뒤 줄곧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강렬한 취업의 고통에 소규모 예술공연기획사는 입사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생애 첫 노동의 좌절은 청년 시기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는 데 상처가 된다.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은 “블랙기업은 인턴이나 계약직 청년을 생애 첫 노동현장의 문턱에서부터 주저앉게 만든다”고 말했다. 청년유니온이 19~34살로 취업상태에 있거나 일시적 실업상태에 처한 청년 3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노동자의 근속 평균 기간은 1년2개월로 겨우 1년을 넘겼다. 현재 또는 최근 직장과 유사한 업종에서 일한 전체 기간은 2년4개월이었다. 이들의 평균 이직 횟수는 2.8번으로 나타났다. 정 국장은 “직장생활을 할 때 반복적인 상처를 겪고 이탈을 경험하다 보면 부당한 권리침해에도 무뎌져 침묵하게 되고, 나중엔 방관자가 돼 조직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고용 상태가 불안정한 이들은 성폭력 등 인권침해에도 쉽게 노출된다. 조명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중견기업에 입사했던 ㄷ(29)씨는 회사를 다니던 1년2개월이 지옥 같았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하혈까지 하고 나서야 안 되겠다 싶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회사는 성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회식은 그에게 고문의 시간이었다. 옆 부서 팀장은 회식 때마다 다가와 “넌 누구를 닮았다”며 추파를 던졌다. “널 보고 있으면 간통죄가 없어졌으면 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심지어 그 팀장의 아내에게 전화를 받은 날도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남자 직원이 여사원들에게 야한 동영상을 메일로 돌렸다. 여사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징계를 담당해야 할 인사팀에선 “여사원들이 평소에 어떻게 했길래…”라며 남자 사원을 두둔했다. ㄷ씨는 회사의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듯 “차라리 백수가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ㄹ(26)씨는 첫 직장에서 한달 내내 폭언을 들었다. 신생 엔터테인먼트회사에서 홀로 홍보마케팅 일을 맡은 그에게 연관 부서의 팀장은 수시로 트집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사람이 쓴 거냐?”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멱살을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잘해보고 싶었던 그는 온갖 모욕을 꾹 참았다. 어떻게든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월급이 아깝다” 같은 변함없는 폭언이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자 그는 4개월 만에 회사를 관뒀다. 자신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듯해 우울함이 오래갔다. 지금은 종교만이 유일한 위로다.

블랙기업은 악덕기업일까. 정 국장은 “블랙기업을 악덕기업이라고 해버리면 그렇지 않은 기업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라며 “그래서 블랙기업 지표 연구를 통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지표로 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직장내 괴롭힘, 폐쇄적 소통구조 네 분야를 꼽고, 정규직 희망고문, 근로계약 자체의 무질서, 실적관리를 위한 압박 등 구체적인 10개 항목을 그 안에 담았다. 블랙기업 체크리스트를 상반기에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구조적인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제공할 계획이다. 지표로 굳이 체크하지 않더라도 취업 때 수입을 과장하고 허세를 떠는 기업은 초장부터 의심해야 한다는 게 청년유니온의 설명이다.

만일 내가 다니는 회사가 블랙기업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참지 말고 드러내라’는 게 청년유니온의 조언이다. 정 국장은 “각종 시민단체에 노동상담부터 받아보라”고 권한다. 임금체불 등 법령 내부의 문제라면 행정적 절차를 밟을 수 있고, 외부의 문제라면 사회에 알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참고 견디는 것은 개인과 기업,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정 국장은 “우리 경제를 떠받칠 산업의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노동이 부정적인 경험으로 뒤범벅돼 성장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개인이 홀로 참고 견디다 자살하는 극단적 상황은 더 큰 절망으로 가는 징후”라고 설명했다.

청년유니온은 사례 접수 사이트를 노동신고센터로 전환해 지속적으로 블랙기업 노동사례 취합 및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오는 7월에는 블랙기업을 업종별·분야별로 나눠 ‘청년착취대상’ 시상식도 열 계획이다. 블랙기업을 양산하는 노동시장을 규제하고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블랙기업 법안 마련도 고민중이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블랙기업 방치하면 나라 장래가 없다”

일본 시민사회 근절 운동 활발

‘나는 블랙기업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젠 한계가 온 것 같아.’

2008년 6월 일본 신초사에서 출간한 책의 긴 제목이다. 인터넷 사이트 ‘2채널’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모아 편집한 이 책은 ‘노동자를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블랙기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2009년에는 블랙기업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3년 ‘블랙기업’은 그해 최고의 유행어·신조어로 꼽혔다.

애초 ‘블랙기업’이란 용어는 2000년대 중반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어, 35살이면 더는 일하기도 어려워 정년을 맞는” 일본 정보기술(IT) 업종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노동자 쓰고 버리기는 점차 다른 업종에도 퍼져나갔다. 비영리법인 포제(POSSE) 등이 창설한 ‘블랙기업 대책 프로젝트’는 누리집에서 “블랙기업이란 말이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급속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며 “대학 신규 졸업자들을 채용해 쓰고 버리는 성장대기업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프로젝트는 2013년 9월11일 블랙기업에 희생되는 젊은이들이 없도록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상황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창설됐다. 이들은 “블랙기업의 만연은 일본 사회 전체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프로젝트는 피해자 구제·지원 활동과 함께 조사활동을 하고, 블랙기업 문제를 이슈화하고 있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노동법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추가 피해의 발생을 막기 위한 노력도 한다. 프로젝트에는 노동조합과 변호사, 노무사, 정신과 의사, 생활빈곤자 지원단체 등이 참가하고 있다.

작가와 변호사, 대학교수, 노동조합 간부 등으로 구성된 블랙기업대상 기획위원회는 2012년부터 대표적인 블랙기업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블랙기업에 사회적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의 경우 9월에 시상식을 열어 대상에 야마다전기를 선정하는 등 11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도쿄도의회, 아키타서점, 외식 체인업체 다이쇼 등도 10위 안에 들었다. 2012년에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사자인 도쿄전력, 2013년에는 선술집 체인 와타미푸드서비스에 대상을 주었다. 블랙기업 선정을 위한 인터넷 투표에는 2013년 3만여명이 참가했다.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일본 정부도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무라 노리히사 후생노동상은 2013년 8월 “젊은이가 쓰고 버려지는 문제를 방치하면 일본 재건 전략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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