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9·11 테러로 어머니 리사를 잃은 어맨다 트레로톨라가 어머니가 자신과 쌍둥이 형제인 마이클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NPR 누리집 화면 갈무리
쌍둥이인 마이클과 어맨다 트레로톨라 남매(23)는 2001년 9월11일 엄마 리사가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노스타워에서 숨졌을 때 3살이었다. 리사는 이 건물에 입주한 뉴욕 항만청 직원이었다.
어린 시절 남매는 ‘엄마가 불 속에서 숨졌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남매가 11살이 되자 ‘엄마가 9·11 테러로 숨졌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때문이었나. 아버지는 남매가 기차·비행기·배를 못 타게 했고, 심지어 집에서 한시간 거리인 뉴욕 맨해튼에도 못 가게 했다. 어맨다는 “우리 가족이 본질적으로 국가적 비극의 일부라는 사실, 그런 느낌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공영 라디오 <엔피아르>(NPR)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미국 여객기 4대를 납치해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을 공격한 9·11 테러 20주년을 앞두고 미국 언론들이 앞다퉈 ‘9·11 자녀’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약 3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로 부모를 잃은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심장질환,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연구(마운트시나이의대·2005년)도 있다. 이제 19살~30대로 자란 9·11 자녀들은 5일 <엔피아르>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참극의 피해자로 사는 것의 상처와 부담감, 그리고 회복에 대해 얘기했다. 방송은 이들이 “9·11에 부모가 죽은 것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결코 잊지 않는다”고 짚었다.
니콜라스 고르키(19)의 엄마 폴라는 금융회사인 모건스탠리딘위터의 애널리스트였다. 9·11 당일 입덧이 너무 심해 사무실인 세계무역센터 사우스타워에 지각 출근하다가 노스타워에 첫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니콜라스를 임신한 지 7주가 됐을 때였다. 도이체방크 임원으로 업무 미팅을 하러 사우스타워에 가 있던 아버지 세바스찬은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니콜라스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자라면서) 모든 게 불안했다. 언제나 ‘만약에, 혹시라도?’를 묻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이제 요가 강사가 된 어머니한테서 심호흡을 통한 마음 가라앉히기 등의 조언을 받아왔지만, 지난해 대학 입학으로 가족과 떨어진 뒤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부모님이 9·11 테러 전에 고려했던 대로 유럽으로 이사를 갔다면 자기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한다.
리아 퀴글리(19)는 아버지 패트릭 퀴글리 4세가 승객으로 탑승한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사우스타워를 때리고 난 지 한달 뒤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진 속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존재할 뿐이다. 7살 때부터 9·11 테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한 캠프에 다니면서 “우리에게 공통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9·11 자녀’라는 꼬리표가 불편하다고 했다. “아무도 내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모르고, 그래서 매우 어색해집니다.” 학교 사회시간에 9·11에 대해 배울 때 일부 교사들은 그에게 ‘교실에서 나가도 좋다’고 제안했다.
안 응우옌(24)의 아버지 캉은 아메리칸항공 77편이 충돌한 워싱턴 펜타곤에서 해군의 전기기술자로 일하다가 41살 때 숨졌다. 그는 테러 20주년이 되는 11일 펜타곤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어머니와 함께 갈 예정이다. 집에서 여는 제사엔 아버지가 좋아했던 쌀국수와 과일, 째(베트남 간식)를 올릴 생각이다. 소프트웨어 공학도인 안은 곧 조지메이슨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다. 아버지가 따고자 했던 학위다. 안은 학위를 아버지에게 바치는 9·11 테러 20주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걸어온 길과 견뎌온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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