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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지독한 대접’ 받고 유럽 떠난 이라크인들 “우리는 동네북이었다”

등록 2021-11-22 15:37수정 2021-11-22 19:35

벨라루스 통해 유럽 간 이라크 이주민들
주변국들 멸시·박대에 쫓겨나듯 귀국
“우리는 ‘유럽 정치 게임’의 볼모였다”
벨라루스에서 귀향한 이라크 출신 이주민이 18일 아르빌 공항에 도착해 이동하고 있다. 아르빌/AP 연합뉴스
벨라루스에서 귀향한 이라크 출신 이주민이 18일 아르빌 공항에 도착해 이동하고 있다. 아르빌/AP 연합뉴스

“우리는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동네북이었다.”

유럽 이주를 꿈꾸며 벨라루스로 향했던 아랍 이주민 일부가 지난주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지난 18일 저녁(현지시각) 이라크 쿠르드 자치주의 주도 아르빌의 공항으로 400여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지대에서 겪은 참담한 경험에 대한 회한, 무력감, 절망을 털어놓았다고 <워싱턴포스트>가 21일 전했다.

이들이 벨라루스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을 통해 ‘벨라루스가 조직한 여행 패키지로 오는 이들에겐 입국절차를 완화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벨라루스를 거쳐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 유럽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꿈을 꾼 것이다. 이라크 젊은이의 4분의 1은 직업이 없으며, 정치권력은 부패, 무능, 비효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벨라루스 여행은 이런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유럽에서 더 나은 삶을 찾을 황금 같은 기회였다.

모하메드 라시드(23)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차량을 포함해 가진 모든 것을 팔았다. 알란 오트만(18)도 4년 간 식당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엘리아스 쿠데르(36)는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기회를 기다려왔다”, 그의 어머니는 “여길 떠날 때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폴란드 정부는 이런 꾀임에 빠져 벨라루스에 입국한 중동 출신 이주민들이 국경 지대에 수천명, 전체적으로 1만5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 도착한 뒤 이들 앞을 막아선 것은 ‘엄혹한 현실’이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여러 ‘바가지 요금’에 시달렸다. 수도 민스크의 호텔에선 하룻밤에 최고 1천달러(118만원)를 내야 했고, 국경까지 가는 택시 요금은 한 사람에 300달러(35만원)를 불렀다. 라시드는 “모두가 우리 지갑만 노렸다”고 말했다.

어렵게 도착한 국경의 현실은 더 참담했다. 벨라루스 국경경비대는 아랍에서 온 이주민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를 막아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경경비대는 ‘불청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폴란드 쪽에선 개를 풀어 위협했고, 리투아니아에선 소몰이 막대를 휘둘렀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면, 이번엔 벨라루스 경비병들의 욕설과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벨라루스는 이주민들을 유럽연합(EU)을 압박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했다.

밤이 되면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텐트가 별로 없어 혹독한 추위를 그냥 견뎌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먹을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어도 여덟 명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오트만은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다 빠져 죽은 사람을 목격했다. 쿠데르는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고 신경도 안 썼다. 모든 게 정치였다”고 말했다.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지자 견디다 못한 이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오트만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트만은 “나는 거기서 끝까지 버티다 죽을 각오였지만 어머니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라시드는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다”고 몸서리쳤다.

아르빌 공항에 도착하자 언론이 몰려들어 그들을 둘러쌌다. “왜 이곳을 떠났느냐?”, “이라크에 뭐가 문제냐?” 질문이 쏟아졌다. 후세인은 “더 나은 삶을 찾고 싶어서 떠났다. 이렇게 굶주리고 목말라서 돌아와,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디어에 얘기하려고 간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돌아온 이들은 한때 떠나려고 했던 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라시드는 “여기엔 우리 생활이 없다. 직업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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