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미국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임신중지 처벌을 위헌으로 선언한 ‘로 앤 웨이드’ 사건 판례를 뒤집으려는 것에 대한 항의 시위가 사흘째 진행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누가, 왜?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방대법원 최악의 ‘보안 사고’를 놓고 유출자와 동기에 대해 전혀 상반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유출자는 1972년 <워싱턴 포스트>에 워터게이트에 대한 결정적 제보를 한 ‘딥 스로트’ 이후 가장 거물급 제보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폴리티코>는 임신중지 처벌을 위헌으로 선언한 1973년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려는 대법원 다수의견 1차 초고를 2일 공개하면서 “사건 관계자”에게 받았다고만 했다. 제보자는 98쪽짜리를 판결문 초안을 통째로 건넸다. 대법관을 보좌하며 자료에 접근이 가능한 로클러크(law clerk·재판연구원) 등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보도 직후, 반세기 동안 실정법으로 작용한 판례를 깨려는 행태를 막으려는 진보 성향 인사의 반발이 제보 동기일 것이라는 짐작이 쏟아졌다. 강한 사회적 저항을 유도하면 판단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최후의 희망을 품었을 수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배신”과 “노골적 위반”에 대해 대법원 경찰대에 조사를 지시한 상태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급진 좌파”를 색출해야 한다며 유출자를 진보 쪽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임신중지 불법화를 원하는 보수파가 흘렸을 가능성도 떠오르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그 근거로 다수의견 5명 중 이탈 움직임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은 로버츠 대법원장이 기존 판례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임신중지 불법화에 대한 주정부 자율권을 일부 인정하는 타협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이 사설은 로버츠 대법원장이 신참인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가능성도 시사했다. 두 대법관은 초고에 다수의견 가담자로 나온다. 이들 중 하나라도 이탈하면 9명 중 4명밖에 확보하지 못한 다수의견은 더 이상 다수의견이 못 된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6-진보 3’ 구도에서 보수에 속하지만 수장으로서 양쪽을 절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유출된 초고가 3개월이나 전인 2월에 작성된 점도 이런 의심과 연결된다. 초고는 강경한 임신중지 불법화론자인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대표 집필해 다수의견 가담자들에게 회람한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유출 사태에 대한 성명에서 “초고 내용은 어떤 대법관의 최종 입장도 아니다”라며, 선고 전까지 의견은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이 초고가 작성된 2월 이후에도 대법관들은 꾸준히 의견 개진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견 편에 섰던 대법관들 중 일부가 태도를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강경파에서 이탈 방지를 위해 초고를 유출했을 개연성이 있다. 다수의견 가담자로 공표된 상태에서 입장을 바꾼다면 여론의 반발 때문에 그런다는 오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치 파벌과 다른 게 뭐냐’는 말을 들어온 연방대법원은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까지 듣게 생겼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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