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제헌의회 의원들이 16일 칠레 북부 해안도시 안토파가스타에서 열린 새 헌법 초안 공개 행사에서 초안이 담긴 책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안토파가스타/AFP 연합뉴스
칠레 제헌의회가 열달 만에 새 헌법의 본문 초안을 마련했다. 9월 국민투표를 통과하면, 피노체트 군사정부 시절 제정된 헌법을 40여년 만에 대체하게 되지만 반대 여론이 높아 가결을 낙관하기 힘든 상황이다.
제헌의회 의장 마리아 엘리사 킨테로스는 16일 칠레 북부의 항구도시 안토파가스타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새 헌법 초안을 공개했다고 영국 <가디언>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민주적으로 기초한 헌법 초안을 만들어냈다”며 “물론 우리가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지만, 오늘 우리는 칠레 국민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를 제때 제대로 된 내용으로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새 헌법 초안은 499개 조항으로 이뤄졌으며, △무상 고등교육 등 교육권 확대 △정부 부처의 성 평등 강화 △의료·주거권과 환경권 확대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정부의 책임 등을 담고 있다. 양원제인 의회를 단원제로 바꾸는 정치 개혁 등도 포함돼 있다.
이날 공개된 본문 초안은 제헌의원(총 155명) 40명으로 구성된 조화위원회에서 자구 중복과 충돌 등에 대한 미세 조정을 거쳐 가다듬은 뒤 7월4일까지 제헌의회 최종안으로 완성된다. 동시에 헌법서문담당위원회는 헌법 서문의 작성을 논의하며, 과도기규정위원회는 현행 헌법에서 신헌법으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규정 등을 마련한다. 헌법 초안이 이렇게 최종 마무리되면 9월4일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칠레의 이번 헌법 개정 추진은 2019년 10월 칠레 사회를 뒤흔든 대규모 시위에서 비롯했다.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시위가 교육·의료·연금 등 사회 전반적인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로 확산하며, 쿠데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집권기(1973~1990)인 1980년 제정된 헌법이 사회 불평등과 부조리를 해결하긴 역부족이란 지적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 5월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졌고, 두달 뒤 제헌의회가 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제헌의회 의장 킨테로스는 “우리는 헌법 조문 하나하나를 통과시킬 때마다, 2019년 대규모 시위에서 제기된 더 나은 의료와 교육, 연금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담았다”고 말했다.
이번 초안에는 사상 처음 칠레 원주민의 헌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원주민의 땅에 대한 배상을 제안하는 문구도 포함돼 있다. 칠레의 최대 규모 원주민인 마푸체 원주민인 로사 카트릴레오는 “이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승인되든 거부되든 상관없이 칠레 원주민은 이미 승리했다고 믿는다”며 “우리는 우리 주장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도록 했으며, 이제 다시는 칠레 사회의 논의 구조에서 배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할지는 속단하기 이르다. 개헌은 국민 80% 이상의 지지로 추진됐으나, 최근 그 열기가 급속히 식어 최근엔 지지세가 30%대 후반~40%대 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펠리페 아르보에 전 상원의원은 지난 4월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제헌의회는 좌편향돼 전국민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공직 경험이 없는 교사, 사회활동가, 원주민 등 무소속 의원(48명)들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에 치우쳐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두달 전 취임한 진보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 신임 대통령은 개헌 찬성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최근 전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 여파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한 상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올해 칠레의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애초보다 1.5% 하락 조정했다. 제헌의회가 제안한 개헌안이 9월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 현행 헌법이 그대로 유지된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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