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의 임신중지권 폐지 판결 방침이 알려진 지난 3일 위스콘신주 매디슨시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결문 초안을 확정한다면 여성들은 죽을 것이다.”
세계적 의학전문지 <란셋>(Lancet)의 누리집과 최근호(399호) 표지를 장식한 글의 첫 줄이다.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내용이 담긴 미국 연방대법원의 초안이 유출되면서 후폭풍이 거센 가운데, 세계적 의학전문지가 “연방대법원이 안전하게 낙태할 권리를 부인한다면, 여성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법적으로 지지하는 꼴이 될 것”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란셋>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방어돼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사설을 냈다. 누리집 첫 화면과 최근호 표지에는 사설 내용의 일부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깨는 쪽으로 투표하는 법관은 임신중지를 멈추게 하는 데에 결코 성공할 수 없고, 그저 안전한 임신중지를 끝장내는 데에만 성공할 것이다. (판결문 초안을 작성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과 그의 지지자들은 여성들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강한 비판의 메시지를 실었다.
앞서 지난 2일(현지시각)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를 뒤집기로 했다며 98쪽짜리 다수의견 판결문 초안 전문을 공개했다. ‘로 대 웨이드’ 판례는 ‘임신중지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사생활의 권리 침해’라며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판결이다. 이 판결에 따라 미국 여성은 임신 6개월까지 스스로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의학학술지 <란셋>(Lancet)이 누리집과 최근호(399호) 표지에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결문 초안을 확정한다면 여성들은 죽을 것이다.”라는 사설 속 문장을 적었다. 사진 <란셋> 누리집 갈무리
<란셋>은 공개된 판결문 초안을 두고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지적했다. “법원이 21세기 여성의 현실을 모르는 18세기 문서에 결정의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견 초안에서 대법관들은 “헌법은 임신중지를 언급하지 않았다”며 임신중지권은 헌법 조항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학술지는 사설에서 “법은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도전과 곤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며 “대법원은 오늘날 임신중지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건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임신과 임신중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짚었다. 사설은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약 1억2천만건의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5분의 3은 임신중지로 이어지고, 그 중 55%만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한 사례로 집계된다고 전했다. 사설은 “법이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면 여성들의 생명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인종적, 계급적 문제도 언급됐다. 이 학술지는 “미국에서 흑인 여성의 의도하지 않은 임신율은 백인 여성의 두배”라며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로 흑인 산모가 사망하는 비율은 백인 여성보다 거의 세배나 높다. 이런 인종적, 계급적 격차를 고려하면 더 이상의 법적 장벽이 아니라 긴급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여성의 행복과 성평등을 위한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란셋>은 법원이 여성에 대한 국가의 통제에 앞장서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 학술지는 “소수의 판사 집단이 여성과 가족,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도록 돼 있는 지역사회를 해치는 것이 허용될 때 미국은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라며 “법원이 안전하게 낙태할 권리를 부인한다면 이는 여성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법적으로 지지하는 꼴이 될 것이고, 여성의 건강과 권리 보장에 장애물이 될 것이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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