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바머’테드 카진스키가 체포 직후인 1996년 4월 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7년간 소포 폭탄으로 3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다치게 하면서 미국인들에게는 공포를, 연방수사국(FBI)에는 악몽을 안긴 ‘유나바머’ 테드 카진스키(81)가 수감 중 사망했다.
미국 연방교정국은 카진스키가 노스캐롤라이나주 감옥에서 10일 새벽 의식이 없는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아침 숨졌다고 밝혔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1942년 시카고에서 소시지 공장을 경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카진스키는 지능지수가 160~170으로 평가될 정도로 천재로 불렸다. 16살에 하버드대 수학과에 조기 입학하고 미시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5살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조교수가 됐다. 하지만 2년 만에 사직하고 몬태나주 산악지대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야생에 가까운 생활을 시작했다. 전기와 수도도 없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채소를 길러 먹으며 살았다.
카진스키는 1978년 시카고 근처 노스웨스턴대에 보낸 사제 폭탄 소포가 폭발해 경비원에게 부상을 입힌 것을 시작으로 연쇄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이듬해에는 비행 중인 아메리칸항공 여객기 짐칸에 그가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비상착륙해야 했다. 연방수사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 수사가 시작됐다. 특별수사팀에는 그의 공격 대상인 대학(university)에서 앞의 두 철자 ‘un’, 항공사(airline)에서 앞 철자 ‘a’를 따고 폭탄(bomb)이라는 단어를 합쳐 ‘유나밤’(UNABOMB)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언론은 테러범을 유나바머라고 불렀다. 폭발물에는 ‘자유 클럽’(Freedom Club)을 뜻하는 ‘FC’라는 문자가 써 있었다.
카진스키의 폭발물 소포에 1985년 컴퓨터 상점 주인, 94년 광고회사 경영자, 95년 목재 산업 단체 대표가 목숨을 잃고 모두 23명이 다쳤다. 그때까지 연방수사국은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서 17년 동안 허탕을 치고 있었다. 곧 기회가 찾아왔다. 유나바머가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자신이 쓴 3만5천자짜리 선언문을 싣지 않으면 계속 테러를 저지르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두 신문은 연방수사국과 상의한 끝에 글을 싣기로 했다. 연방수사국은 유나바머가 약속대로 범행을 중단할 수도 있고, 그가 누구인지 단서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선언문을 싣자고 했다. 수사를 이끌며 이를 결정한 사람이 현 법무장관 메릭 갈런드다.
카진스키가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으로 두 신문에 실은 글은 결국 체포로 이어졌다. 그는 선언문에서 “과학은 인간의 진정한 복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질주한다”며,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전기나 통신 수단 같은 “모든 기술 발전은 보통 사람이 더 이상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며 정치인·경영자·기술자·관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쏟아냈다. 그래서 기술 전공 교수 등 현대문명을 이끄는 이들을 없애려고 했다는 것이다. 형과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그의 동생이 신문에 실린 선언문 내용과 형의 문체가 비슷하다며 연방수사국에 제보를 했다. 선언문은 그의 과거 글과 문체가 비슷하고 오자까지 같았다. 연방수사국은 오두막에 있던 그를 체포했다.
현대문명에 대한 거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카진스키의 범행 동기도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천재 수학자였던 그의 범행 동기는 철학적 배경보다는 비뚤어진 사고방식 이상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많다. 어릴 적부터 내향적이고 가족이나 학교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 고립적 성향이 그를 유나바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족과 변호사는 정신적 문제를 강조했고, 결국 사형이 아닌 종신형이 선고됐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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