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과 미군 장병들이 지난해 10월 판문점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AFP 연합뉴스
백악관과 미국 국방부가 미군 병사의 판문점 월북 사실을 확인하면서 북한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18일(현지시각) 기자회견에서 미군 병사가 자진 월북했다면서 “북한이 그를 구금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오스틴 장관은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며, 그 병사의 가까운 친척들에게 이를 알리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나는 우리 병사들의 안녕을 가장 우려하기에 이 사건에 계속 집중하겠다”고 했다.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미군 병사가 판문점 견학 중 허락을 받지 않고 고의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며 “국방부가 사건을 해결하려고 북한의 상대방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국 국방부가 “조선인민군과 접촉하는” 한국 및 스웨덴과도 공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상황을 “매우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잔피에어 대변인은 한-미 핵협의그룹(NCG) 첫 회의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조정관이 병사 송환 문제에 관여하냐는 질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악관, 국방부, 국무부, 유엔이 모두 관여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설명을 종합하면,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사령부가 북한군과 접촉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국 정부를 경유한 대북 접촉도 추진하면서, 미국의 이익대표부 역할을 하는 평양 주재 스웨덴대사관에도 협조를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언론들은 월북한 병사는 육군 이등병 트래비스 킹으로, 폭행 사건으로 한국 수감시설에서 2개월 가까이 구금됐다가 1주일 전 석방됐다고 미군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킹은 텍사스주 미군 시설에서 추가 징계를 받기 위해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호송 인력이 공항 보안심사구역 안으로 그를 들여보냈는데 공항을 빠져나와 판문점 견학에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국 송환 절차를 밟던 그가 어떻게 판문점 견학에 합류할 수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 목격자는 그가 군사분계선을 넘으며 “하하하” 웃었다고 전했다.
과거에도 북한에 억류된 미국 시민 송환을 놓고 북-미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킹 이병의 월북이 북-미 대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을 끈다. 2018년 5월에는 그 다음달에 열릴 첫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러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이 미국 시민 3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2009년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 기자 2명과 함께 귀국했고, 이듬해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인 1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미국 고위급 인사가 평양을 방문해 미국 시민과 함께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앞선 경우들은 북-미 관계가 풀리고 있거나, 북한이 적극 풀려고 시도하는 중에 전직 미국 대통령 등이 북한 최고 지도자를 만나고 ‘성의’의 징표로서 미국 시민과 동반 귀국하는 형태였다.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한-미 핵협의그룹 회의가 열리고 미국 전략핵잠수함이 42년 만에 한국에 기항한 날 월북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이에 반발해 19일 탄도미사일 2발을 동해상으로 쐈다. 이번 사안은 갈등의 한복판에서 발생한데다, 당사자가 처벌을 피하려고 자진 월북한 점까지 고려하면 단기간에 북-미 관계 개선의 단초나 상징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발생한 미국인 자진 월북 사례는 2018년 10월 중국과의 국경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가 붙잡힌 브루스 바이런 로런스의 경우다. 그해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과 비핵화 논의를 이어가던 북한은 한 달 만에 그를 추방했고, 미국 정부는 감사의 뜻을 밝혔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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