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에서 한 단계 강등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핵심 자산인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이 깎인 것은 국가 부도 위기의 결과로, 백악관이 반발하는 등 파장이 일고 있다.
피치는 1일 미국의 장기 신용등급을 기존의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주요 신용평가사가 미국 신용등급을 깎은 것은 12년 만이다.
피치는 신용등급 강등 이유로 25조달러(3경2310조원)어치가 발행된 미국 국채를 둘러싼 “거버넌스(통치 체제) 약화”를 제시했다. 상반기에 부채 한도 인상을 놓고 지출 대폭 삭감을 요구하는 공화당과 조건 없는 인상을 내건 백악관의 대립으로 사상 최초의 국가 부도 위기에 빠진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벼랑끝 대치 끝에 타협이 이뤄지면서 디폴트(채무 불이행) 예정일을 나흘 앞두고 부채 한도 적용 유예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피치는 이런 상황에 대해 “부채 한도를 놓고 정치적 대치와 막판 해결이 반복되면서 재정 관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됐다”며 “미국 정부에는 중기 재정 프레임워크도 없다”고 지적했다. 피치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3.7%였던 연방정부 재정 적자가 감세 등으로 인한 수입 부족, 대규모 정부 사업, 고금리 탓에 올해 6.3%까지 늘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강등은 피치와 함께 3대 신용평가사들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2011년 8월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내렸을 때와 비슷하다. 당시에도 부채 한도 협상이 난항을 겪어 부도 위기설이 퍼졌다. 그때도 막판 타결에 성공했지만, 스탠더드앤푸어스가 정치적 혼란을 이유로 역대 최초로 미국 신용등급을 깎아 금융시장에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세계적 안전자산’임을 내세워온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이 다시 깎이자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피치의 평가 조정은 자의적이고, 시간이 지난 데이터에 근거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냈다. 그는 피치의 결정에 절대 동의하지 못하며 미국 국채는 “아주 안전한 유동성 자산”으로 계속 남아 있다고 했다.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주요국들 중 가장 강력한 경제 회복을 이끈 상황에서 미국을 강등시킨 것은 현실과 어긋난다”는 성명을 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피치의 조처가 미국 국채의 국제적 역할에 즉각 도전이 되리라고 보는 투자자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신용등급 강등은 투자자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결과 발행 비용이 늘면 22년 만에 금리가 가장 높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부담이 더 커진다.
정치 양극화가 국가 신용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커지는 것도 불안한 대목이다. <뉴욕 타임스>는 신용등급 조정을 사전에 브리핑해준 피치가 2021년 ‘1·6 의사당 난동 사태’를 여러 번 거론했다는 게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 설명이라고 전했다. 잭 스미스 특별검사는 신용등급 하향이 발표된 이날 난동 사태 책임을 물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은 이날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열어 앞으로 금융시장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 2011년 미국 신용등급 하향 때보다는 여파가 작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필요 시 시장 안정 조처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코스피(유가증권시장)는 전 거래일보다 1.90% 내린 2616.47, 코스닥은 3.18% 하락한 909.76에 마감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98.50원으로 마감해 전일대비 14.70원 올랐다.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 영향으로 국제 달러인덱스(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가 소폭 하락했음에도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 가치는 국내 주가가 큰폭으로 하락한 영향을 더 받아 오히려 약세를 보였다. 외환 딜러들은 “이번 신용등급 강등이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지만 외환시장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노이즈’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