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17일(현지시각) 한 남성이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 참가해 투표 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산티아고/EPA 연합뉴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독재 시절에 제정된 헌법을 새 헌법으로 바꾸려는 칠레의 시도가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실패했다.
칠레 선거관리국은 17일(현지시간) 새 헌법 제정 찬반 국민투표 개표 결과, 찬성 44.24%, 반대 55.76%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찬성표가 과반에 이르지 못함에 따라 개헌안은 부결됐다. 지난해 9월 4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개헌안은 찬성 38.18%, 반대 61.87%로 부결된 바 있다.
개헌안이 두차례 부결됨에 따라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 임기 중 개헌은 불가능해질 전망이다. 보리치 대통령은 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나라가 양극화하고 분열되어 있다”며 개헌안 마련 과정이 “모두가 함께 쓴 새 헌법을 확보한다는 희망을 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2026년 3월에 끝나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세번째 개헌안 통과를 시도하지 않겠다며 앞으로 연금과 세금 개혁에 치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칠레는 지난 2019년 10월 사회 불평등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새 헌법 제정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2020년 10월 25일 국민투표에서 78.3%의 압도적 찬성으로 새 헌법 제정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구성된 헌법위원회는 성평등 등 각종 사회적 권리를 강화하고 원주민의 권리도 보장하는 등 진보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헌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론 수렴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개헌안 부결 이후엔 우파 정치 세력이 약진했다. 헌법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기 위해 지난 5월7일 실시된 선거에서 극우 정치인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가 이끄는 공화당이 35.41%를 득표해 전체 50석 중 23석을 확보했다. 우파 정당인 ‘안전한 칠레’도 11석을 차지하면서 우파가 의결에 필요한 31석보다 3석을 더 확보했다. 보리치 대통령이 속한 좌파 정당인 ‘칠레를 위한 연합’은 28.59%의 득표율로 16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우파가 주도한 새 헌법안은 1980년 피노체트 대통령 치하에서 제정된 헌법보다 더 시장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게다가 임신중지(낙태) 불법화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태아 생명권 보호’ 조항이 포함되고 원주민의 권리에 대한 언급도 빠져 국민투표 전부터 논란이 됐다. 여성 운동가 소피아 로드리게스는 “새 헌법안은 그동안 사회운동을 통해 확보한 권리들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위험하다”며 “칠레를 위한 후퇴이자, 칠레 여성들을 위한 후퇴”라고 비판했다.
로이터 통신은 최근 몇년 동안 양극화와 정치권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많은 칠레인들이 새 헌법 제정 절차에 대한 불신과 환멸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