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는 좌파일색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외교, 경제적인 화두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좌파라는 말을 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2000년 이후 가속화 된 좌파 휘몰이가 이제는 더 이상 시대적인 유행이 아니다. 몇 일전 새로 당선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좌파정부의 강력한 통합을 외치고 있으며 브라질의 룰라를 선두로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가 공동 전선을 펴고 있다. 쿠바는 전통적인 좌파 국가로서 반미의 핵을 이루고 있다. 파라과이가 좌파에 가세하였고, 우루과이에서까지 100년이 넘는 우파 일색의 역사전통에서 최초로 좌파 대통령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페루와 칠레도 급진적이지는 않아도 좌파를 표방하는 가르시아와 미첼렛이 각각 대통령에 올랐다. 최근 선거에서는 니카라과 반미의 대표적인 주자인 오르떼가가 당선됨으로서 남미 좌파에 새로운 힘을 보탰다. 위에 열거한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록 대통령은 우파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국민들의 좌파 경향은 넓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우파의 대표적인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와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도 좌파의 성장과 더불어 좌우의 갈등이 강력한 사회적인 불안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부 활동이 시위의 수준을 벗어나 총격전으로 번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는 좌파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으로 대략적인 흐름을 관찰해 볼 수 있다. 먼저 단기적인 원인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망과 반발을 들 수 있겠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20세기를 거치면서 게릴라, 쿠데타, 내란 등과 같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였다. 전통적인 사회, 경제적 계층구조에서 비롯된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노력 중에 혁명과 투쟁이 가장 호소력 있는 대안이 되었다. 민중세력과 이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보수세력들이 팽팽하게 대립을 해왔다. 결국 폭력은 지울 수 없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미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갈등과 투쟁, 혼란의 양상에 지친 중남미 사람들이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하나둘씩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수십년간 계속되는 게릴라전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왔던 것이다. 결국 개방과 민영화를 통해 국가경제를 발전시켜 가난한 사람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이상을 추구 해 보기에 이른다.
“이제는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세상이다”,
“이데올로기는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우리기업 외국기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개방과 협력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표어들이 90년대에 들어서 신자유주의에 가속도를 더해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론스타’였다. 지구촌을 위하는 기업이라는 말은 사탕발림에 불과하였다. 다국적 기업은 거울조각을 들고 와서 아주귀한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여 금과 은을 노략질 해갔던 지난날의 식민주의자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 신자유주의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숙이 받아들인 나라부터 “모두가 다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이란 말은 결국 가진자들이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한 술수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주축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오늘날의 좌파 휘몰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는 배고픈 자의 외침이다. 거시적-장기적인 원인을 본다면 좌파의 원인은 정복한 자와 정복당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극명하게 구분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이분화에 대한 반발이다. 500여년 가까이, 그러니까 1492년 서양의 침입에서부터 시작된 원주민과 하층민들의 삶의 현실은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위협이었다. 서양은, 그리고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쉼 없이 변해왔건만 이 땅의 주인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의 삶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호소와 투쟁으로 일관한다. 우리는 가끔 남미의 원주민들을 보며 그들이 수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경외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있는 허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수백년전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문명의 혜택도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음식조차 사기 힘든 소득수준을 가진 인구가 전체인구의 48%(1990년), 44%(2002년)를 기록한다.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현실은 오늘날 왜 좌파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500여년동안 절대빈곤의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은 그들에게 음식을 줄 정권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는 그 필연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다수가 굶주렸던 과거를 통해 볼 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야 나타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까지도 하다. 누가 이것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하하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비하하고 있는 듯하다. 인기를 위해서 장기적인 대안을 생각지 않는 무책임함이라고 비난한다. 구조적인 국가 발전을 생각하지 않는 정권욕의 결과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대책 없이 국민들에게 선심성 돈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이러한 비난에 동의할 수 없다. 굶어죽는 자에게 밥을 주고 아픈 자를 치료해주는 행위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우파 정부가 배고프고 병든 자들에게 지난 오백년간 ‘더 기다려’라는 말로 일관해왔으며 그렇게 기다리다 죽어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은 ‘발전을 위한 분배의 유보’로 이어지는 500년의 과거였고 그렇게 절대소수는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고 절대다수는 굶어 죽어갔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게 문제점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3400가지 문제점이 불거져 국민들의 순수한 바람을 저버리고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난을 하기에 앞서 그러한 비난이 근본적인 중대한 점들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한 서양인들은 원주민들에게 광산에서 노동을 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 덕분에 유럽의 은 값은 1/3로 떨어질 정도였다. 독립이후 19세기의 서구열강은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사탕수수, 바나나를 재배하는 대농장에서 노동을 시키며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지금은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서 나라가 잘 살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도 호의호식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20세기의 미국기업들도 역시 비슷한 청사진을 보여주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을 착취해왔다. 그러나 그 약속은 그리고 그 믿음은 한 번도 지켜져 본적이 없다. 20세기 중엽 에비타와 페론 정권이 아르헨티나에서 민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때도 그랬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국민복지정책을 펼칠 때에도, 니카라과에서 3대에 걸친 독재정치를 한 소모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중립정부를 구성했을 때도 미국은 그들이 친미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미래의 발전을 생각지 않은 무책임한 포퓰리즘 정권이라고 비난하였다. 역사상 단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때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것을 포퓰리즘이니, 대책 없는 선심이니,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짓이니 하는 말로 비하하여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부자들에 의하여 조정되는 세계의 여론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상 가진자들이 순수한 인간애로 자신의 더 많은 이익을 자제하고 사재를 털어 민중들을 위해서 베풀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볼리비아가 친미 우파 대통령을 내세워 다국적 기업과 협력해서 송유관을 만든 다면 과연 국가 경제가 발전을 하여 굶어죽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겠는가? 그러한 희망과 기대로 지난 500년을 허비하여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최극빈층이 18%에 이르고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지난 10년간 영양부족의 상태에 있었다는 지표가 말해준다. 다국적 기업이 에콰도르의 가난한 이를 위해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그 후에 민중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미국이 독점하면 그 나라의 빈민들에게는 무엇이 돌아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역사는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미국과 기득권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판단이다. 부자나라, 부자기업, 부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일억짜리 집에 살 때는 5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이 뭐 더 아쉬울 것이 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5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은 20억짜리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항상 아쉽고 부러운 법이다. 월급을 150만원 받을 때는 한 달에 300만원을 받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정말이지 별 아쉬움 없이 돈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300만원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되어보면 결국 아쉬움이란 150만원 받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0억짜리 아파트를 가지면 동해에 별장을 하나 정도 소유하고 싶고 그것을 이루고 나면 서해안의 무인도를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다음은 그곳을 왔다 갔다 하는 배를 한 척 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결국, 라틴아메리카의 부자들이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다국적 기업이 민중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욕망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가 발전하고 안정되면 그때 가서 굶어 죽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을 보려하지 않는 이기심의 결과이거나 애당초 거짓말이다. 다국적기업을 거느린 서양인과 라틴아메리카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발전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이제 우리가 이정도 발전하였으면 충분해’ 라는 말을 하는 법은 없다. ¡아오라 오 눈까! (¡Ahora o nunca! 지금 아니면 영원히 안돼!)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좋아지면 그때 가서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럴듯한 거짓말 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현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빠따민족해방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활동하는 치아빠스주는 멕시코의 32개의 주 중에서 유아사망율이 가장 높은 주이자 부자들의 사설 비행장이 가장 많은 곳이다. 브라질의 상빠울루는 파벨라(Fabela)라고 불리는 총격전이 끊이지 않는 빈민들의 도시이기도 하고 자가용 헬기로 출퇴근하는 부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잘 사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민중에게 빵을 주는 정책을 무슨 근거로 부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말하겠는가? 비행장의 숫자가 더욱 많아져서 모든 부자들이 개인소유의 우주선이라도 가지게 될 때 그때가 이곳의 굶어죽는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때인가? 도대체 부자들의, 그리고 미국의 욕심은 어디가 그 끝이란 말인가? 국가의 경제를 생각하는 책임있는 정책이란 결국 가진 자가 더 가지게 하기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당장 오늘 먹을 밥을 걱정하는 민중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500여년간 살아온 마당에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정부를 대안 없는 선심정부이니 포퓰리즘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방적인 비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무책임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누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그래서 나는 차라리 부자들의 헬기를 팔아 굶어 죽어가는 1000명의 아이를 살리는데 돈을 쓰는 더욱 지독한 포퓰리스트를 기대해 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기업 외국기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개방과 협력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표어들이 90년대에 들어서 신자유주의에 가속도를 더해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론스타’였다. 지구촌을 위하는 기업이라는 말은 사탕발림에 불과하였다. 다국적 기업은 거울조각을 들고 와서 아주귀한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여 금과 은을 노략질 해갔던 지난날의 식민주의자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 신자유주의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숙이 받아들인 나라부터 “모두가 다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이란 말은 결국 가진자들이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한 술수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주축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오늘날의 좌파 휘몰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는 배고픈 자의 외침이다. 거시적-장기적인 원인을 본다면 좌파의 원인은 정복한 자와 정복당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극명하게 구분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이분화에 대한 반발이다. 500여년 가까이, 그러니까 1492년 서양의 침입에서부터 시작된 원주민과 하층민들의 삶의 현실은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위협이었다. 서양은, 그리고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쉼 없이 변해왔건만 이 땅의 주인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의 삶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호소와 투쟁으로 일관한다. 우리는 가끔 남미의 원주민들을 보며 그들이 수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경외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있는 허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수백년전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문명의 혜택도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음식조차 사기 힘든 소득수준을 가진 인구가 전체인구의 48%(1990년), 44%(2002년)를 기록한다.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현실은 오늘날 왜 좌파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500여년동안 절대빈곤의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은 그들에게 음식을 줄 정권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는 그 필연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다수가 굶주렸던 과거를 통해 볼 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야 나타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까지도 하다. 누가 이것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하하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비하하고 있는 듯하다. 인기를 위해서 장기적인 대안을 생각지 않는 무책임함이라고 비난한다. 구조적인 국가 발전을 생각하지 않는 정권욕의 결과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대책 없이 국민들에게 선심성 돈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이러한 비난에 동의할 수 없다. 굶어죽는 자에게 밥을 주고 아픈 자를 치료해주는 행위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우파 정부가 배고프고 병든 자들에게 지난 오백년간 ‘더 기다려’라는 말로 일관해왔으며 그렇게 기다리다 죽어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은 ‘발전을 위한 분배의 유보’로 이어지는 500년의 과거였고 그렇게 절대소수는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고 절대다수는 굶어 죽어갔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게 문제점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3400가지 문제점이 불거져 국민들의 순수한 바람을 저버리고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난을 하기에 앞서 그러한 비난이 근본적인 중대한 점들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한 서양인들은 원주민들에게 광산에서 노동을 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 덕분에 유럽의 은 값은 1/3로 떨어질 정도였다. 독립이후 19세기의 서구열강은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사탕수수, 바나나를 재배하는 대농장에서 노동을 시키며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지금은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서 나라가 잘 살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도 호의호식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20세기의 미국기업들도 역시 비슷한 청사진을 보여주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을 착취해왔다. 그러나 그 약속은 그리고 그 믿음은 한 번도 지켜져 본적이 없다. 20세기 중엽 에비타와 페론 정권이 아르헨티나에서 민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때도 그랬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국민복지정책을 펼칠 때에도, 니카라과에서 3대에 걸친 독재정치를 한 소모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중립정부를 구성했을 때도 미국은 그들이 친미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미래의 발전을 생각지 않은 무책임한 포퓰리즘 정권이라고 비난하였다. 역사상 단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때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것을 포퓰리즘이니, 대책 없는 선심이니,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짓이니 하는 말로 비하하여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부자들에 의하여 조정되는 세계의 여론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상 가진자들이 순수한 인간애로 자신의 더 많은 이익을 자제하고 사재를 털어 민중들을 위해서 베풀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볼리비아가 친미 우파 대통령을 내세워 다국적 기업과 협력해서 송유관을 만든 다면 과연 국가 경제가 발전을 하여 굶어죽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겠는가? 그러한 희망과 기대로 지난 500년을 허비하여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최극빈층이 18%에 이르고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지난 10년간 영양부족의 상태에 있었다는 지표가 말해준다. 다국적 기업이 에콰도르의 가난한 이를 위해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그 후에 민중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미국이 독점하면 그 나라의 빈민들에게는 무엇이 돌아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역사는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미국과 기득권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판단이다. 부자나라, 부자기업, 부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일억짜리 집에 살 때는 5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이 뭐 더 아쉬울 것이 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5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은 20억짜리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항상 아쉽고 부러운 법이다. 월급을 150만원 받을 때는 한 달에 300만원을 받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정말이지 별 아쉬움 없이 돈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300만원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되어보면 결국 아쉬움이란 150만원 받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0억짜리 아파트를 가지면 동해에 별장을 하나 정도 소유하고 싶고 그것을 이루고 나면 서해안의 무인도를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다음은 그곳을 왔다 갔다 하는 배를 한 척 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결국, 라틴아메리카의 부자들이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다국적 기업이 민중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욕망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가 발전하고 안정되면 그때 가서 굶어 죽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을 보려하지 않는 이기심의 결과이거나 애당초 거짓말이다. 다국적기업을 거느린 서양인과 라틴아메리카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발전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이제 우리가 이정도 발전하였으면 충분해’ 라는 말을 하는 법은 없다. ¡아오라 오 눈까! (¡Ahora o nunca! 지금 아니면 영원히 안돼!)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좋아지면 그때 가서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럴듯한 거짓말 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현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빠따민족해방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활동하는 치아빠스주는 멕시코의 32개의 주 중에서 유아사망율이 가장 높은 주이자 부자들의 사설 비행장이 가장 많은 곳이다. 브라질의 상빠울루는 파벨라(Fabela)라고 불리는 총격전이 끊이지 않는 빈민들의 도시이기도 하고 자가용 헬기로 출퇴근하는 부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잘 사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민중에게 빵을 주는 정책을 무슨 근거로 부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말하겠는가? 비행장의 숫자가 더욱 많아져서 모든 부자들이 개인소유의 우주선이라도 가지게 될 때 그때가 이곳의 굶어죽는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때인가? 도대체 부자들의, 그리고 미국의 욕심은 어디가 그 끝이란 말인가? 국가의 경제를 생각하는 책임있는 정책이란 결국 가진 자가 더 가지게 하기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당장 오늘 먹을 밥을 걱정하는 민중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500여년간 살아온 마당에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정부를 대안 없는 선심정부이니 포퓰리즘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방적인 비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무책임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누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그래서 나는 차라리 부자들의 헬기를 팔아 굶어 죽어가는 1000명의 아이를 살리는데 돈을 쓰는 더욱 지독한 포퓰리스트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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