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공대 ‘학살의 재구성’
“그는 아주 철두철미해 보였어요. (총에 맞아) 모두 쓰러지고, 저는 엎드려 죽은 체했어요.”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에린 시헨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당시를 떠올렸다. 노리스홀의 207호 강의실에서 독일어 수업을 듣던 그는 수강생 15명 가운데 간신히 목숨을 건진 4명 중 하나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아주 심각하면서도 차분한 표정의” 청년은 건물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며 22구경과 9㎜ 권총을 난사해 모두 32명을 숨지게 하고 적어도 15명을 다치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시간30여분 동안 캠퍼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의 마무리였다.
기숙사에서 시작된 학살=작은 대학도시인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를 뒤흔든 이번 사건은 16일 아침 7시15분(현지시각)께 시작됐다. 학생 900여명이 입주한 기숙사인 웨스트 앰블러 존스톤홀에서 여자친구를 찾던 범인은 4층에서 남·녀 학생 1명씩을 사살하고 2명을 다치게 한 다음 종적을 감췄다. 출동한 경찰은 현장을 조사하고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강의실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고, 범인이 학교를 벗어났다고 판단한 경찰은 기숙사 총격사건에 대처하는 데 집중했다.
2시간 뒤 강의실에서 학살 재연=그러나 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의 서막에 불과했다. 2시간이 지나 기숙사에서 북쪽으로 1㎞ 가량 떨어진 노리스홀로 이동한 범인은 독일어 강의실로 들어서자마자 교수의 머리에 총을 쏘고 학생들한테 총구를 돌렸다. 순식간에 강의실 바닥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1학년생 에린 시헨은 범인이 강의실을 나간 뒤 학생들이 강의실 문을 몸으로 막았고, 그는 30초쯤 지나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우리의 말소리를 그가 들었던 것 같다”고 <시엔엔>(CNN)에 말했다. 문이 열리지 않자, 범인은 문에다 대고 총을 쏴댔다.
탄창을 넣은 검은색 조끼를 입은 범인은 복도와 다른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다. 어떤 학생들은 책상 밑으로 숨어 총탄을 피했고, 일부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몇몇은 휴게실로 뛰어들어가 문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강의동 문 걸어잠근 채 난사=목격자들과 경찰은 범인이 흥분해 날뛰며 총을 난사했다기보다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일’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그는 학생들을 줄을 세운 다음 총격을 가하기도 하고, 10~20분간 ‘여유’를 가지고 탄창을 갈아끼우며 살육을 계속했다고 한 목격자가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경찰은 이날 저녁 기자회견에서 범인이 건물 출입구를 쇠사슬로 걸어 잠갔다고 밝혔다. 사무실과 강의실, 실험실이 들어선 3층짜리 건물에 있던 이들은 ‘독 안의 쥐’였던 셈이다. 강의실들이 배치된 2층에서 아침 첫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주된 표적이 됐다.
신고를 받고 오전 9시45분께 현장에 도착한 경찰 특공대가 잠긴 문을 부수고 건물로 진입했다. 경찰은 총소리를 들으며 2층으로 올라가 범인을 제압하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범인이 자신의 머리를 겨눈 권총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가득한 화약 연기와 피로 흥건한 바닥, 31구의 주검만이 남겨져 있었다. 모든 게 끝난 뒤인 9시55분에야 “총을 지닌 사람이 캠퍼스에 있다. 건물 안에 머물고, 창문과 떨어져 있으라”는 내용의 전자우편이 학생들한테 보내졌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미국 버지니아주 버지니아공대에서 16일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뒤, 경찰이 대학 버러스홀의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앉아 있다. 블랙스버그/AP 연합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진 미국 버지니아 버지니아공대에서 경찰들이 사건이 벌어진 건물에 무기를 들고 접근하고 있다. 버지니아/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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