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언론, 성장배경·가족사 소개 “미국문제…한국은 사과말라”
“낯선 세계의 고립된 소년.”(〈워싱턴포스트〉) “침묵이 갉아먹은 삶.”(〈뉴욕타임스〉)
미국 언론들은 지난 주말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에 포착됐던 ‘이상 징후’를 집중 조명하는 한편, 그의 치밀한 범행 준비 과정도 재구성했다.
〈뉴욕타임스〉는 22일 수사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서울에서 미국까지 조씨 일가의 여로를 재구성한 뒤, “조씨가 어떻게 깊은 침묵 속에서 살인적 증오를 키워갔는지, 어떻게 마지막 시간들을 빈틈없이 계획해갔는지” 실마리가 드러나고 있다고 썼다.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범행 한 달 전 행적은 치밀한 계획성에 다시 한번 섬뜩해진다. 3월12일 렌트카회사에서 소형 승합차를 빌린 그는 로아노크에 머물며 실내 사격연습장을 드나들었고, 승합차 속에서 스스로 비디오 촬영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3월31일, 지난달 7~8일엔 월마트 등에서 사냥칼, 장갑, 체인 등을 샀고, 8일에는 크리스찬버그의 햄턴호텔 방에서 비디오를 더 찍었다. 범행 당일 이미 그의 신용카드 사용액은 수천달러에 이르렀다. 이 즈음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깎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했으나, 아무도 그의 분노가 뇌관에 최종 압력을 넣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워싱턴포스트〉도 21일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조씨의 성장 배경과 가족사를 상세히 소개했다. 보도를 보면 그는 이미 고등학교 때 “자신만의 우주” 속에서 살았다. 친구들이 “오늘 승희가 또 무슨 소릴 했냐?”고 숙덕일 정도로 그의 침묵은 깊었다. 대학시절 그는 자신을 “화성에서 목성으로 여행중”인 ‘의문부호’의 사나이라고 소개하기도 했고, 자신의 여자친구가 “우주선을 타고 온 슈퍼모델 젤리”라 하기도 했다. 기숙사 방 친구는 추수감사절 때 그로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가 앓고 있던 마음의 병은 여러 차례 신호를 보냈던 셈이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20일 ‘한국에 보내는 편지’란 사설을 통해 “주한 미 대사관 앞의 촛불 추모식과 한국 대통령의 애도와 충격 표시는 감동적이지만 문제는 한국이 아니다”라며 “우리가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더 이상 사과하지 말아 달라”고 썼다. 사설은 “우리가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해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러지 않으면 인간 정신의 추악한 왜곡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이해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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