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엘크 그로브 고등학교의 한 학생이 18일 경제 수업 시간에 미국 금융위기 관련 뉴스를 살펴보고 있다. 엘크 그로브/AP 연합
신 자유주의 30년
“FRB의장·재무장관, 시장실패 선언” ■ 월스트리트저널
“미 자본주의 새로운 항로로 나아간다” ■ 블룸버그뉴스
“미 금융시장 영원한 변화가 생겼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던 지난해부터 헨리 폴슨 재무장관에게 정부가 대대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계속 경고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연구한 경제학자인 버냉키 의장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어떤 대재앙을 맞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출신인 폴슨 장관은 처음에는 개입을 꺼렸다. 그러나 에이아이지(AIG)에 구제금융을 투입한 뒤에도 시장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버냉키 의장은 정부가 전면적으로 나서야만 할 때라고 폴슨 장관을 설득했다. 19일 미국 정부는 결국 부실채권 처리기구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미국 경제를 이끄는 두 사람이 ‘작은 정부, 큰 시장’ 원칙에 매달려온 공화당의 원칙을 깨고 ‘시장의 실패, 국가의 귀환’을 공식 선언한 주역이 된 셈이다. <뉴욕 타임스>는 21일, 미국 경제 수장인 버냉키와 폴슨이 지난주 하루 여덟아홉번씩 전화통화를 해가며 씨름한 끝에 어떻게 정부의 개입을 죄악시해온 오랜 도그마를 깨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개입에 나서게 됐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자세하게 전했다.
미국 정부가 부실채권 처리기구 설립을 발표한 뒤 미국 대표 언론들은 일제히 ‘국가가 주도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새시대’가 시작됐음을 선언하느라 바빴다. <블룸버그 뉴스>는 19일 전세계 증시는 회복됐으나 미국 금융시장에는 영원한 변화가 생겼다고 전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좌파는 물론 우파 유럽인들도 미국 금융위기를 “시스템 붕괴”로 규정하고, 규제당국의 ‘어리석은 태만’을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일 ‘미국의 자본주의가 새로운 항로로 나아간다’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지난 일주일은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며, 대공황 이후 최악인 ‘검은 9월’의 금융위기가 정부로 하여금 가장 강력한 시장개입에 나서도록 재촉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폴슨 장관은 정부의 규제가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미국 금융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제 미국 정부는 금융 시스템 불안의 근본 원인을 직접 겨냥한 광범위한 조처를 내놓는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 금융시장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익과 손실을 내도록 하는 것이 번영의 지름길이라는 믿음, 시장이 과열됐을 때는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는 희망, 정부는 게임의 규칙만 정하며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이 이제 모두 폐기됐다는 진단이다. 정부는 대공황 때보다 훨씬 신속하게 대처에 나섰다. 리처드 실러 뉴욕대 교수는 이 신문에 “지난 20년간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젯거리’라는 레이건 행정부의 구호가 시장을 지배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시장이 문제이고 정부는 해결책’이라고 말한다”고 진단했다.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일 독일이 주요 8개국(G8) 회의 의장국을 맡았던 지난해 초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규제 등 시장 투명성을 높이려는 방안들을 제시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주요 금융사들이 활동 내용을 공개하지도 않은 채 불건전한 투자를 일삼은 데는 미국과 영국의 책임도 있다며 “미국과 영국이 이제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나마 일보 진전”이라고 지적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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