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4일 주최한 투표 참여 행진에 참가한 한 대학생이 오바마 후보를 상징하는 스포츠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엘리자베스시티/AP 연합
링컨 ‘노예해방 선언’ 146년만에 흑인대통령
“오바마 피부색이 뭐든… 흑인인 건 보너스”
“오바마 피부색이 뭐든… 흑인인 건 보너스”
“우린 노예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지금을 보라고요!” 아칸소주의 흑인 대학생인 대스민 할러웨이는 <에이피>(AP) 통신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다’고 외친 지 45년 만에, 미국은 케냐 남성의 아들을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선출했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미국 흑인의 역사
1619년, 8월, 네덜란드 해적선 한 척이 북아메리카 동부 대서양 연안 버지니아에 흑인 20여명을 떨구었다. 영국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이 사들인 계약제 하인들이었다. 40여년 뒤 본격화될 미국 흑인노예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862년 9월 링컨 대통령은 버지니아 정부가 노예제 법령들을 공표한지 꼭 200년만에 ‘군사적 이유’로 노예 해방 선언을 했다. 1866~68년 사이 흑인의 시민권(수정헌법 14조)과 참정권( 〃 15조)도 보장됐다. 비천한 ‘노예’에서 어엿한 ‘시민’으로 승격했지만, 끔찍한 테러와 노골적인 인종차별의 장벽까지 걷힌 것은 아니었다. 1865년 재향군인 친목모임으로 창설된 케이케이케이(KKK)단은 극우 백인우월주의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 흑인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흑인들은 헌법이 보장한 투표권을 실제로 행사하고 백인과 결혼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60년대는 유럽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혁명의 시대’였다. 인종 문제에서도 ‘평등’과 ‘차별’, ‘진보’와 ‘반동’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적어도 제도적 차원에서 인종차별 장벽은 대부분 철폐됐다. 1896년 연방대법원이 “차별은 부당하지만, 구별은 정당하다”는 궤변을 합법화한 ‘짐 크로우’ 체제(흑백분리법)도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종식됐다. 1965년에는 투표권보장법이 통과돼 흑인들의 투표를 가로막는 장벽이 무너졌고, 1967년에는 흑인이 백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뒤집어보면, 흑인들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지 이제 40여년 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반면,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도 잇따랐다. 63년 에드가 에버스를 시작으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63년), 맬컴 엑스(65년), 마틴 루서 킹(68년) 등 흑인 민권운동지도자 또는 유색인종 지위 개선을 지원했던 거물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60년대의 저항운동은 이후 적어도 드러내놓고 흑백 차별이나 분리를 언급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졌으며, 수많은 흑인들이 정·관계로 진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지난 3일 이번 대선의 마지막 유세지로 버지니아주를 택했다. 390년전 북미 대륙에 최초로 흑인들이 팔려온 곳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꿈이 영글었다. 이제 흑인들은 “우리의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곳에서 살게 되기를” 염원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오바마, 예스 위 캔”…“흑인인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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