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종 몇시간만에 바닥
만삭 임산부도 못받아
백신 1600만명분 불과
만삭 임산부도 못받아
백신 1600만명분 불과
24일 토요일 오전 7시부터 시카고 노스사이드에 있는 트루먼대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메리 케이트 메르나(28)도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왔다. 하지만 그에겐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임신 9개월인 내가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비상사태라고 하는데, 그게 사람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 아느냐”라고 말했다. 이날 시카고 보건 당국은 6개 대학에서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 백신을 무료로 접종한다고 발표했다. 접종 시작 불과 몇 시간 만에 백신이 바닥나면서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공포의 바이러스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미국에서 현실로 재현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신종 플루 확산에 따른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이날, ‘누구나 백신을 얻을 순 없다’는 현실에 미국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컸다. 연방정부는 비상사태 선포가 ‘예기치 않게 신종 플루가 악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지난봄 신종 플루 발생 초기에 미국 연방정부는 10월 말께 1억2000만명, 연말께 2억명에게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생산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백신은 1600만명분에 불과하다고 <뉴욕 타임스>가 24일 보도했다. 수정란에서 백신을 생산하는 과정이 애초 예상보다 느리게 진행된 탓이다. 연말이 돼도 백신 생산량은 3000만명분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일부 주에선 요구한 백신의 10분의 1만을 할당받았다. 버지니아주의 페어팩스 카운티는 이날 10곳에서 신종 플루 백신 접종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연방정부에 요구한 분량을 받지 못하면서 한 곳에서만 백신 접종을 실시했다.
세계보건기구가 지난주까지 집계한 신종 플루 사망자 4735명 가운데 3539명이 남북아메리카에 집중돼 있지만, 신종 플루는 북반구에서 겨울이 다가오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24일 보도했다.
지난 주말 네덜란드에선 14살 소녀가 신종 플루로 숨지면서 신종 플루 사망자가 6명으로 늘었다. 체코공화국에서도 첫 신종 플루 사망자가 나왔으며, 독일에서도 사망자가 3명으로 늘었다. 한 주 만에 신종 플루 감염자가 두 배로 늘어난 영국에서도 사망자가 128명으로 증가했다. 터키·베트남·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사망자가 새롭게 출현하거나, 사망자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학교 폐쇄 등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백신 공급이다. 그리스는 23일 11월 중순부터 만성질환자·임산부·어린이를 우선으로 백신 접종 캠페인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는 15만명이 이미 접종을 마쳤다. 유럽연합(EU) 회원 27개국 가운데 많은 나라들이 백신 접종을 이미 시작했거나, 조만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아에프페>는 유럽의약품 허가 당국(EMEA)의 말을 빌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백신을 공급할 수 있느냐”라고 전했다. 유럽연합의 인구는 5억명에 이른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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