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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월급 달라” 미국인들, 자본독주에 ‘레드카드’

등록 2011-10-04 20:56수정 2011-10-05 10:31

르포|‘월가 시위’ 진원지 주코티 공원 가보니
“금융권 탐욕 심판하라” 수백명 분노의 메아리
“시위대에 피자 갖다줘라” 유럽서도 주문전화 와
한쪽선 섹소폰·기타 선율대학 축제 같은 ‘해방구’
금융권과 부자들의 탐욕과 빈부격차에 항의해 3주째 계속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의 근거지인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은 3일(현지시각) 밤에도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분노의 목소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매일 저녁 7시에 열리는 ‘총회’는 시위대 중 한 명이 앞에서 구호를 외치면 이를 따라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금융권의 탐욕과 부패를 심판하라”, “99%와 1%의 싸움이다”, “더는 미국의 정치 과정을 믿지 않는다” 등 비판을 퍼붓다가 “우리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각오를 다지기도 하고, 때론 “우린 지금 슬리핑백이 필요하다. 미국의 시민들이여, 이건 비상상황이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슬리핑백을 기부해달라”며 필요한 물품 목록을 읊기도 했다. 중간중간 “마이 체크, 마이 체크”(My check, 내 월급)를 후렴처럼 함께 외쳤다. 공공장소에선 확성기를 쓰는 게 불법이어서 맨 앞에서 한 사람이 한마디를 말하면, 이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 함께 복창해 오히려 확성기를 쓰는 것보다 더 큰 목소리가 건물 벽에 부딪쳐 메아리를 울리며 퍼졌다.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 바로 옆에 위치한 주코티 공원 주변은 30~40층의 높은 건물이 둘러쳐져 있다. 이 조그마한 공원에 오랜 노숙으로 꾀죄죄하고 덥수룩한 모습의 젊은 시위 군중이 가득 차 있는 묘한 대조는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의 현 모습, 그리고 이번 시위의 성격을 그대로 그려주고 있다.

여기저기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종이상자로 만든 손팻말에는 “월가는 미국 경제의 기생충”,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먹고 산다”, “평등, 민주주의, 혁명”, “억만장자, 너의 시대는 끝났다”, “월가의 도박꾼이여, 기업의 살인마들이여, 부패한 정치가여, 모두 사라져라” 등 꽤 과격한 구호들이 난무했다.

시위대는 ‘주코티 공원’을 예전 이름인 ‘리버티 공원’으로 부른다. 총회가 열리는 바로 옆에선 5~6명의 ‘인터넷 전사’들이 집회 상황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 곧바로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대의 누리집과 페이스북 등에 띄운다.

한쪽에선 총회가 열리고, 또 한쪽에선 한 무리가 색소폰과 오보에 연주에 맞춰 쓰레기통을 드럼 삼아 현란하게 두드리고, 춤을 추는 등 80년대 한국 대학가의 대동제에 온 듯한 느낌이다. 긴 머리, 청바지 차림의 남녀가 바닥에 앉아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불러 60년대 히피 문화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푸른색 비닐을 씌운 매트리스, 침낭, 그리고 배낭 등이 어지러이 흩어져 마치 거대한 노숙자촌에 온 것 같기도 하다.

마치‘해방구’의 모습이었다. 한쪽 옆에는 여기저기에서 기부한 음식들을 펼쳐놓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가져가서 먹는다. 피자, 팝콘, 비스킷, 과일, 음료수 등이다. “시위대가 늘어나는 것보다 기부되는 음식량이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한다. 인근의 한 피자집은 미국 전역, 심지어 유럽에서도 “리버티 공원으로 피자 ○○판을 배달해 주라”는 주문이 쏟아져 하루 200판의 피자를 배달한다. 사과도 잔뜩 쌓여 있다. 점심시간에는 마치 뷔페식당처럼 길게 줄을 늘어서 배식을 한다. 그러나 다들 ‘자신이 먹을 만큼만’ 조금씩 가져갈 뿐이다.

한쪽 벽에는 각종 책을 기부받아 ‘도서관’도 꾸며 놓았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책을 읽는 시위대들도 여럿 있었다. 이 자유 광장에서는 누구나 말 그대로 완벽한 형태의 자유를 구가하지만, 술, 마약, 폭력, 성추행은 금지된다. 또 야간에는 자체 순찰조가 주변을 다니며 혹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한다. 이들 시위대는 특별한 지도부가 없이 시위 계획이나 방향성을 직접 민주주의 형태로 결정하기 때문에 결정은 매우 늦고, 한쪽을 향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 광장에 모여 밤을 지새우는 시위대 중 이를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이들은 “언론은 자꾸 우리들을 향해 ‘다음은 뭘 할 거냐’를 묻는다. 그건 여기 있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며,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밤이 깊어가자, 한쪽에는 밤새 꺼지지 않을 불빛 아래에서 대화와 토론이 끊이지 않지만, 수백명의 시위대 대부분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간간이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그 옆에는 5~6명이 둘러앉아 옆사람 잠 깰까봐 기타를 조용히 뜯고, 목소리 낮춰가며 노래를 불렀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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