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회고록 발간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회고록 발간
“2001년 한-미 정상회담 전
파월, 대북온건책 유지 밝히자
부시가 새벽에 전화해 격노”
“2001년 한-미 정상회담 전
파월, 대북온건책 유지 밝히자
부시가 새벽에 전화해 격노”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가 1일(현지시각) 시판된 회고록 <최고의 영예, 워싱턴 시절의 회고>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싼 부시 행정부 내의 치열한 다툼과 한국의 전임 대통령에 대한 인상을 전했다.
부시 행정부 기간 내내 대북정책 라인은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축으로 하는 강경파(매파)와 콜린 파월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비둘기파)로 나뉘어 대립했는데, 그 대립은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처음 가시화됐다. 부시 취임 뒤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워싱턴 포스트>가 파월 장관의 말을 인용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접근법을 유지할 것이라는 뜻을 한국 쪽에 전달할 것”이라고 보도하자, 부시 대통령은 새벽 5시에 라이스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냈고 파월이 해명에 나서도록 했다. 라이스는 “이 정상회담 이후 대북정책은 행정부에서 가장 이견이 많은 이슈가 되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라이스는 “솔직히 부시 대통령도 강경 매파의 입장이었다”며 “나 역시 북한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체니와 럼스펠드 등이 주장하던) 정권교체 전략은 동북아에서 한국이나 중국이 함께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닌데다 실행가능한 정책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라이스는 이라크 침공 등 부시 대통령의 중동정책은 적극 옹호했다. 리비아 민주화 또한 “2003년 무아마르 카다피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핵무기 및 생화학무기 해체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가 궁지에 몰리면서도 이런 무기를 쓸 수 없었다”며 “당시 부시 행정부의 조처가 있었기에 리비아 민주화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카다피를 ‘괴물’, ‘자신의 머릿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라이스를 흠모한 것으로 알려진 카다피가 자신에게 사진 스크랩북을 보여주고 노래를 들려준 것 등에 대해선 “괴상한 경험”이라고 언급했다.
라이스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인상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해선 “부드러운 태도의 노정객인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북한 체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고 평하면서도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기록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혹평에 가까웠다. 라이스 전 장관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통령”이라며 “나에게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며 강의를 하는 등 반미적 모습을 시사하는 발언을 때때로 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2007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당시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요청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기자들에게 말했는데, 노 대통령은 ‘종전선언에 대해 말을 빠뜨리신 것 같은데, 명확히 말씀을 해주셨으면 한다’고 요청해 부시 대통령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소 놀랐다”고 전했다. 그는 통역사가 통역을 중단할 정도로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노 대통령은 외견상으로는 그 상황이 얼마나 기이한 상황이었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2006년 11월11일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라이스 국무장관(오른쪽)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하노이/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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