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병기’ 운동을 주도해온 ‘미주 한인의 목소리’의 피터 김 회장(가운데 마이크 잡고 발언하는 이)이 6일(현지시각) 법안 통과 뒤 버지니아주 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주하원에서 유일한 재미동포인 마크 김 의원(오른쪽 둘째)이 옆에 서 있다. 박현 특파원
버지니아주 동해병기법 통과
이민 2세의 “일본해” 말에 충격
청소·세탁·식품점 종사자들 모여
의원 140명 성향 분석해 일일이 설득
1년만에 주의회 통과 이끌어
이민 2세의 “일본해” 말에 충격
청소·세탁·식품점 종사자들 모여
의원 140명 성향 분석해 일일이 설득
1년만에 주의회 통과 이끌어
시작은 아주 작은 사건이었다. 1977년 미국 버지니아주로 이민을 온 피터 김(55)씨는 2012년 2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얘기를 하다가 충격을 받았다. ‘동해’를 어떻게 부르느냐고 물었더니 ‘Sea of Japan’(일본해)이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고 했더니 아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어떡하느냐고 항변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이렇게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교과서의 지명 표기를 바꿔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공립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동해 병기’ 법안은 이미 그전에 다른 사람들이 시도한 적이 있다. 민주당 데이브 마스덴 주 상원의원이 지역구 한 재미동포의 요청으로 2011년 이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2012년 1월 상임위에서 부결되는 등 지지부진했다.
김씨는 처음엔 베트남계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백악관 청원운동에 나섰다. 두 차례나 청원했으나 연방정부가 교과서 바꾸는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는 좀더 조직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15명가량 됐다. 모두 빌딩 청소업, 세탁업, 식품점 등에 종사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족이 운영하는 법률회사에서 고객관리 일을 맡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가 이번 법안 통과를 주도한 ‘미주 한인의 목소리’라는 사단법인이다.
이 단체는 2013년 1월 공식 출범을 하고 주 상원 40명, 하원 100명의 의원 파일을 만들어 성향 분석 작업을 했다. 다른 한편으론 각종 자료를 찾아 동해 병기의 타당성을 알리는 파워포인트 자료도 만들었다. 여기엔 동해라는 이름의 역사성과 한국·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 두 나라가 지명에 합의하지 못하면 병기를 권고한 국제수로기구(IHO) 결의 등이 담겼다. 그리고 일일이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고, 행사를 찾아다니며 후원금도 냈다. 저인망식 설득 작업을 편 것이다. 그해 11월 버지니아주 의회에서 민주·공화 양당이 동해 병기 법안을 초당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주미 일본대사관이 이 일에 개입하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일본대사관은 대형 로펌을 로비단체로 고용하고 사사에 겐이치로 대사가 직접 나서 주지사와 주 의회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법안 부결을 요청했다.
피터 김 회장은 “일본이 이렇게 나선 것은 버지니아주 교과서가 바뀌면 남부 7개주는 물론 다른 주들도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이런 집요한 로비 탓인지 올해 1월 주 상원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한 법안이 하원 소위 1차 표결에선 4대 4의 상황까지 연출되기도 했다. 주지사도 흔들리는 듯했다.
다시 재미동포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재미동포들은 공화당 지도부를 찾아가 지난해 말 주지사와 검찰총장 선거 때 민주당에 박빙의 표 차이로 패배한 사실을 거론하며 한인 유권자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압박했다. 공화당 쪽은 협조 뜻을 밝혔다. 공화당 소속의 하원의장과 당대표가 이 법안의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동안에는 한-일간 대결로 비치면 의원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현실을 고려해 철저하게 버지니아주 교육 이슈로 접근했으나 일본 쪽이 노골적으로 나오자 어쩔 수 없었다. 안호영 주미대사가 주지사와 의회 지도부를 만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결국 하원의원 100명 중 20명이 공동발의자로 나서 대세가 굳어졌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이번 법안 통과와 관련해 “(한인) 동포 사회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며 “미국 연방정부가 단일지명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나 이것이 밑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리치먼드(버지니아주)/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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