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부터 공립 교과서 표기
동포 400명 의사당 찾아 환호
동포 400명 의사당 찾아 환호
‘찬성 81, 반대 15.’
6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주의회 하원 본회의장 전광판에 이런 숫자가 뜨자, 방청석에서 숨죽이며 표결 결과를 기다리던 재미동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큰 박수와 함께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부 동포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은정기(66)씨는 “오늘은 기쁜 날이다. 한인들의 기쁨이다”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은 이날 본회의를 열어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East Sea)와 ‘일본해’(Sea of Japan)를 동시에 표기하도록 하는 내용의 동해 병기 법안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가결 처리했다. 앞으로 주지사의 서명 절차가 남았으나,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재적의원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찬성을 한 만큼 거부권 행사마저 무의미해 7월 발효가 사실상 확정됐다. 미국 연방정부가 ‘일본해’ 단독표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지방자치단체에서 동해의 병기 사용을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의사당은 버지니아주 각지에서 몰려든 400여명의 재미동포들로 북적였다. 2시간가량 걸리는 버지니아 북부지역에서만 150여명의 동포들이 버스 2대와 밴 2대에 나눠타고 이곳에 왔다. 회의 시작 한시간 전부터 본회의장 방청석에 들어가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150석 규모의 좌석이 꽉 차자, 나머지 동포들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으로 안내돼 회의 진행 상황을 지켜봤다.
참석한 동포들은 주로 50~60대 이상의 중장년층과 노인들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80살을 넘은 노인들도 일제강점기의 악몽을 떨쳐내려는 듯 지팡이를 짚거나 머리가 희끗해진 자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이곳을 찾았다. 노모 이정순(83)씨를 모시고 온 조미경(54)씨는 “어머니는 일제시대를 겪으신 분”이라며 “몸이 아프시지만 아침에 ‘마지막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싶다’고 하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고 말했다.
동포들은 자신들이 일군 개가에 스스로도 놀라는 듯했다. 윤아무개씨는 “그동안에는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동해 법안에 찬성표를!’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온 폴라 박(50)씨는 “1980년에 이민을 온 이후 버지니아주 한인 사회가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버지니아주 하원 내 유일한 재미동포인 마크 김 의원은 “한인들의 힘과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알린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날 의사당에는 최근 동북아 국가 간 갈등 탓인지, 일본과 중국의 주요 언론들도 몰려와 한국 언론과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취재진만 60~70명 됐다.
앞으로 이 법안이 발효되면 2016학년도부터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교과서의 지명 표기가 바뀐다. 관례상 버지니아주 법을 따르는 조지아·앨라배마 등 남부 6개주의 교과서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
한편, 조태영 한국 외교부 대변인은 7일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는 동해 병기 법안 통과를 환영한다”며 “버지니아주 의회의 움직임은 동포들의 노력에 따른 것으로 정부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리치먼드(버지니아주)/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