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쏙] 이스라엘 로비단체 ‘에이팩’ 총회를 가다
지난 3일 저녁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있는 워싱턴컨벤션센터 주행사장. 미국 내 최대 로비단체로 꼽히는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에이팩) 연차총회가 1만여명이 넘는 회원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행사가 무르익자 미국 하원 공화·민주 양당의 2인자인 에릭 캔터 공화당 원내대표와 스탠리 호이어 민주당 원내총무가 함께 무대에 섰다. 캔터 원내대표가 “에이팩만큼 이스라엘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곳은 없다”고 추켜세웠다. 그러자 호이어 원내총무는 “지난 여름 이스라엘을 13번째 방문했는데 이것은 캔터 원내대표보다 1번 더 많은 것”이라며 이스라엘과 우의가 돈독함을 과시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이란 핵협상과 관련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함께 낭독했다. 두 사람은 2~3문장씩 나눠서 편지의 핵심을 함께 읽어내려갔다. 내용은 현재 진행중인 이란과 핵협상에서 미국이 이란의 핵시설 전부를 완전히 폐기하는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우리는 하원 의원들이 이 편지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정치 분열 현상이 극심한 워싱턴에서 양당의 하원 지도자들이 이런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두 사람이 이스라엘을 위한 ‘합창’을 하도록 유도한 것은 에이팩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케리 미 국무·네타냐후 이 총리 등
양국 정관계인사 총회 참석
민주·공화 2인자들, 무대 올라
“이란 핵 전면 폐기” 공동 낭독
중동정책 등 세미나 200여개 열려
로비 비법·리더십 교육 프로그램도
17개지부·10만회원 ‘풀뿌리단체’
유대인 상권 자금력 막강
‘양국 동맹 강화’ 내세우지만
실제론 이스라엘 국익위해 활동
올 방위 지원액 31억달러 따내
1951년 설립된 에이팩은 매년 봄 본부가 있는 워싱턴에서 연차총회를 열어 세를 과시하고 있다. 올해 행사에는 미국 내 17곳 지부의 회원과 중동 전문가 등 1만여명 이상이 참가했다. 올해는 특히 유대인 중·고·대학생 2000여명도 참석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이 조금이라도 빨랐으면 유대인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반성에서 출발한 이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미국-이스라엘 동맹 강화를 모토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국익을 추구한다. 에이팩 총회는 워싱턴의 정계 거물이 대거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의회에서는 하원의 양당 2인자를 비롯해,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원장과 존 매케인·찰스 슈머 상원의원 등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올해는 이란 핵협상을 놓고 백악관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불거진 탓인지 백악관 고위인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존 케리 국무장관과 제이콥 루 재무장관이 연사로 등장했다. 오바마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루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 핵협상을 옹호하는 주장을 20여분간 다소 수세적으로 한 반면에, 케리 장관은 무려 45분간이나 이란 핵협상에 나서는 이유를 설파했다. 2년 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1년 전에는 조 바이든 부통령이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바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해 적지않은 각료들이 참석했다. 에이팩 쪽은 구체적인 의원 참석 수를 공개하지 않은 채 “올해 에이팩 행사에는 상·하 양원 공동행사와 대통령 국정연설을 제외한 어떤 행사보다도 많은 의원들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12년째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시민참여센터의 김동석 상임이사는 “2006년에는 하원에서만 전체 의원 435명 가운데 350명 이상이 참석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런 세 과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및 대중동 정책에서 이 단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이스라엘 방위 지원과 이란 핵문제가 대표적이다. 에이팩은 미국의 이스라엘 방위 지원을 자신들의 첫번째 공적으로 꼽고 있는데, 올해 지원 규모는 31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강력한 대이란 경제제재도 이들의 ‘작품’이다. 에이팩 쪽은 “대이란 경제제재와 관련해 지난 15년간 미국 의회에서 12개 이상의 법안과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이란에 추가 경제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데,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59명의 서명을 받은 상태다.
미국 내 유대인이 인구 600여만명의 소수민족에 불과한데도 에이팩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똘똘 뭉치는 조직력과 유대인 상권에서 나오는 자금력이 그 원동력이다. 에이팩은 미국에 17개의 지부를 갖고 있다. 회원은 10만명가량이지만 이슈가 생겼을 때 동원 가능한 인원은 미국 내 전체 유대인의 10분의 1을 넘어선다고 한다. 회원들은 평소에 자신이 사는 지역구 의원들과 친분을 쌓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현안이 생겼을 때는 이들 의원을 상대로 청원 운동을 한다. 또 선거 때는 유대인을 돕는 후보 쪽에 후원금을 내고 지지운동도 해준다. 그래서 에이팩의 힘은 유대인들의 이런 ‘풀뿌리 운동’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에이팩은 비영리 시민단체라 단체 이름으로는 정치자금을 내는 게 법으로 금지돼 있다. 따라서 에이팩 회원 개개인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인을 후원한다).
매년 봄 워싱턴에서 열린 연차총회는 에이팩 정책 방향과 관련한 의견을 모으는 한편으로 활동가와 일반 시민을 교육시키는 장으로 활용된다. 올해 행사에서는 200개 이상의 세미나가 열렸다. 주제는 미국의 중동정책, 이란 핵협상, 미-이스라엘 미사일방어 협력 등 외교·안보 현안에서부터 그룹 리더 훈련, 로비 기법 등 교육 프로그램까지 다양했다. 특히 연회비를 10만달러 이상 내는 ‘민얀클럽’ 회원들한테는 미국 유력 정치인들과 비공개 리셉션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회원 등급은 워싱턴클럽(1500달러 이상), 캐피털클럽(3600달러 이상), 세닛클럽(1만달러 이상), 프레지던트클럽(2만5000달러 이상), 체어맨카운슬(3만6000달러 이상), 민얀클럽 등으로 구분되며 혜택이 각각 다르다.
3일 오후 열린 이란 핵협상 세미나장. 한 강사가 500여명의 청중을 상대로 이란 핵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강사는 “이란 핵개발 프로그램이 북한보다 훨씬 위험하다”며 “북한은 현재 핵무기를 10개가량 보유하고 있지만 이란이 핵개발에 성공하면 100개 이상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이 보유한 핵 관련 시설 규모가 북한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이란은 최고지도자가 결정만 내리면 1년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문턱에 와 있다며 이란과 핵협상은 반드시 핵시설의 완전 폐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의가 끝나자 10여명이 넘는 청중이 질문에 나섰고 이에 대한 대답이 이어졌다.
또 행사장 한켠엔 ‘유산 기부’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이 코너는 몇년 전 유대인 미래 세대의 교육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가 단초가 됐다. 유산의 일부를 에이팩에 기증해 미래 세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기부는 유언장에 자신의 유산 일부를 에이팩에 기증한다는 문구를 적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행사장 요원은 올해 얼마나 기부됐느냐는 질문에 “그건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몇년 전에는 한해 2억달러가량이 기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에이팩도 1~2년 전부터 시련을 겪고 있다. 이 단체가 강력하게 밀어부치고 있는 이란 추가 제재안을 오바마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외교·안보정책의 중심이 중동에서 아시아로 전환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탓이다. 미국의 중동에 대한 관심이 줄면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도 줄어들 수 있다.
에이팩에서는 이를 1980년대 초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이후 최대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에이팩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첨단무기 판매를 철회시키려 캠페인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에이팩은 로비 전략을 전환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싱크탱크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캠페인을 해오던 전략의 한계를 깨닫고 의회를 공략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올해 에이팩에서는 공화·민주 양당 인사를 공동 연사로 등장시키는 행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캔터-호이어뿐만 아니라 하원 외교위원회의 양당 지도자인 에드 로이스 위원장(공화)과 엘리엇 엥겔 간사(민주당)가 미국의 중동정책을 설명하는 세미나에 나란히 등장하기도 했다. 양당의 분열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만큼은 초당파적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워싱턴/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케리 미 국무·네타냐후 이 총리 등
양국 정관계인사 총회 참석
민주·공화 2인자들, 무대 올라
“이란 핵 전면 폐기” 공동 낭독
중동정책 등 세미나 200여개 열려
로비 비법·리더십 교육 프로그램도
17개지부·10만회원 ‘풀뿌리단체’
유대인 상권 자금력 막강
‘양국 동맹 강화’ 내세우지만
실제론 이스라엘 국익위해 활동
올 방위 지원액 31억달러 따내
1951년 설립된 에이팩은 매년 봄 본부가 있는 워싱턴에서 연차총회를 열어 세를 과시하고 있다. 올해 행사에는 미국 내 17곳 지부의 회원과 중동 전문가 등 1만여명 이상이 참가했다. 올해는 특히 유대인 중·고·대학생 2000여명도 참석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이 조금이라도 빨랐으면 유대인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반성에서 출발한 이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미국-이스라엘 동맹 강화를 모토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국익을 추구한다. 에이팩 총회는 워싱턴의 정계 거물이 대거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의회에서는 하원의 양당 2인자를 비롯해,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원장과 존 매케인·찰스 슈머 상원의원 등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올해는 이란 핵협상을 놓고 백악관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불거진 탓인지 백악관 고위인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존 케리 국무장관과 제이콥 루 재무장관이 연사로 등장했다. 오바마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루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 핵협상을 옹호하는 주장을 20여분간 다소 수세적으로 한 반면에, 케리 장관은 무려 45분간이나 이란 핵협상에 나서는 이유를 설파했다. 2년 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1년 전에는 조 바이든 부통령이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바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해 적지않은 각료들이 참석했다. 에이팩 쪽은 구체적인 의원 참석 수를 공개하지 않은 채 “올해 에이팩 행사에는 상·하 양원 공동행사와 대통령 국정연설을 제외한 어떤 행사보다도 많은 의원들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12년째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시민참여센터의 김동석 상임이사는 “2006년에는 하원에서만 전체 의원 435명 가운데 350명 이상이 참석한 바 있다”고 전했다.
3일 미국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에이팩) 연차총회 행사장에는 1만여명이 넘는 유대인과 미국을 움직이는 정·관계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박현 특파원
3일 미국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에이팩) 연차총회에서 에릭 캔터(왼쪽) 공화당 원내대표와 스탠리 호이어 민주당 원내총무가 나란히 무대에 올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박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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