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한 이란군이 방독면을 쓰고 이라크군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사린가스 탄두 등 5000여기 발견
80년대 미·유럽이 지원해 만든 것
대부분 녹슬고 사용불가능 상태
미군 해체 나섰다 인명사고 빈번
2003년 침공 명분 또 거짓으로
80년대 미·유럽이 지원해 만든 것
대부분 녹슬고 사용불가능 상태
미군 해체 나섰다 인명사고 빈번
2003년 침공 명분 또 거짓으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며 내세운 명분은 당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파괴무기(WMD)를 개발·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을 비롯해 수십만명의 다국적군이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도 결국 대량파괴무기는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던 조지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거짓말쟁이’,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조롱과 비난 속에 백악관을 떠났다. 그는 2008년 퇴임을 앞두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재임 중 가장 후회스런 일로 “이라크에서 (대량파괴무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 획득의 실패”를 꼽기도 했다.
그런데 미군이 사실은 이라크에서 신경·수포 가스 작용제를 비롯한 수천기의 화학무기를 발견하고도 이를 감춰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뉴욕 타임스>가 14일 보도했다. 화학무기는 핵·생물학 무기와 함께 대량파괴무기에 속한다. 이라크 침공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애타게 찾아 헤메던 물증을 마침내 발견한 것일 터인데도 미국은 왜 비밀에 부쳤던 걸까?
여기엔 두 가지 역설이 깔려있다.
미군은 2004~2011년 대략 5000기에 이르는 사린·겨자 가스 등의 화학탄두, 포탄, 공중투하탄 등을 찾아냈다. 2006년에는 이라크 타지 인근의 전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기지에서 2400기가 넘는 신경작용제 로켓탄을 한꺼번에 ‘발굴’한 적도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이 신문이 쓴 ‘발굴’이란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미군이 발견한 화학무기는 거의가 더럽고 녹이 슨 상태로 버려진 것들이었다. 만들어진지 10~20년이 넘은 낡은 무기 잔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무기들은 사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 때 만들어진 것들로 밝혀졌다. 이라크가 이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썼고, 나중에는 이를 사용해 쿠르드족과 시아파 반군 등을 학살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미군은 이것 이외의 새로운 화학무기는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대량파괴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입증할 것은 하나도 찾지 못하고 과거의 유물만 발굴했을 뿐이라는 점이 첫째 역설이다.
또 하나의 역설은 이 화학무기가 다름 아닌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서방은 이란 이슬람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라크를 편들었다. 수세에 몰린 이라크군이 바그다드 인근 무탄나에 화학무기 개발 단지를 세워 독가스탄 개발에 나서자 이 또한 거리낌없이 지원했다. 미군은 무탄나 단지에서 폐기된 겨자가스 로켓탄 2500기를 찾아냈는데, 두 개의 미국 기업이 가스 원료를 제공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무탄나 단지 건설은 독일 기업이 맡았다. 미국 기업이 설계하고 스페인 기업이 제작한 공중투하탄과 이집트와 이탈리아산 지대지 로켓탄도 다량 발견됐다. 이라크의 현존하는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박살내겠다며 쳐들어갔는데, 정작 화학무기까지 후세인에게 안겨준 건 미국과 서방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에 마주친 것이다. 미군이 이를 감출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미국은 비밀리에 발견된 화학무기 해체에 나섰다. 무엇보다 자칫 반군들이 남은 가스작용제로 급조폭탄을 만들어 미군을 공격할까 두려워한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화학무기통제협약의 폐기 규정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알려진 것만 6건의 인명 사고가 벌어졌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 또한 비밀에 부쳤다. 치명적인 사린가스를 함유한 급조폭탄을 해체하다가 유독 가스에 노출됐던 두 병사는 “절대 침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2003년 이후 이라크에서 신경작용제나 겨자가스에 노출된 미군은 17명, 이라크 경찰도 7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화학무기는 미처 해체되지 않은 채 버려지기도 했다. 몇몇 화학무기 보관 장소는 위험한 상태로 남겨졌다. 미 국방부는 이런 무기들은 실질적 위험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선 이라크 반군들이 이를 손에 넣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실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최근 시리아와 터키 국경에 위치한 코바니 지역에서 쿠르드족 민병대와의 전투 도중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중동 전문가인 조너선 스파이어 중동국제문제리뷰(MERIA) 편집장은 13일 “쿠르드족이 7월부터 화학가스에 노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사망한 시신 사진에서 겨자가스에 노출될 경우 나타나는 물집이 보인다”고 말했다. 중동국제문제리뷰에 공개된 쿠르드족 주검 사진에는 흰색 반점이 뚜렷하고 화상을 입어 물집이 잡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슬람국가는 이라크에선 수도 바그다드 코앞까지 진격했는데, 이때 무탄나 단지에서 화학무기를 손에 넣었을 수 있다는 추론이 나온다. 미국과 서방이 뿌린 악마의 씨가 되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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