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공개’ 이끈 81살 상원 정보위원장 9일(현지시각)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앙정보국 고문 보고서’ 작성과 공개를 이끈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81·민주당·가운데)이 보고서 공개 뒤 의회를 떠나면서 기자들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과거사 공개’ 어떻게 가능했나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제동
오바마는 공개엔 반대 안해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힘” 성명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제동
오바마는 공개엔 반대 안해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힘” 성명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불법 구금·고문 실태가 9일 공개된 데는 다이앤 파인스타인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미 상원 정보위원회와 언론의 역할이 컸다.
상원 정보위가 중앙정보국의 불법 구금·고문 실태 조사에 나선 계기는 2007년 12월 <뉴욕 타임스>의 기사였다. 이 신문은 당시 중앙정보국이 알카에다 소속 테러 용의자 2명에게 고문을 가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2005년께 파괴해 증거 인멸을 기도했다고 폭로했다. 정보위는 곧바로 중앙정보국과 조지 부시 행정부에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상황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2009년 초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날 중앙정보국의 국외 비밀수용소 폐쇄와 고문 금지를 명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행정부 차원에서 9·11 테러 이후 불법 구금·고문 실태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에 나서는 데는 주저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일부 의원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구성한 진실화해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 것을 오바마 대통령에게 권유했다”며 “그러나 당시 초당적 협력을 모색하던 오바마는 이를 거절했다”고 전했다.
반면 비디오테이프 파괴 문제를 의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상원 정보위는 2009년 3월 상임위 표결 끝에 조사위원회를 꾸리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중앙정보국의 강력한 반발과 방해공작에 직면해야 했다. 중앙정보국은 정보위의 기밀문서 열람 요청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일부 문서의 열람을 허용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정보위 조사관들은 중앙정보국 본부 인근 비밀 시설에서 본부 정보망과 분리된 별도의 데이터베이스에만 접근할 수 있었다. 중앙정보국은 여기에 분류가 전혀 돼 있지 않은 600만페이지 분량의 문서더미를 제공했다. 조사관들은 이를 3년 동안 분석해 2012년 말 보고서 초고를 완성하고, 중앙정보국에 반론권을 줬다.
‘고문이 효과가 없었다’는 결론의 이 보고서 초안에 중앙정보국의 반발은 더 거세졌다. 백악관에는 보고서 공개를 막아달라고 로비를 벌였다. 중앙정보국은 올해 1월에는 정보위 조사관들이 무단으로 중앙정보국 전산망에 들어가 기밀 보고서를 훔쳐갔다면서, 이들의 컴퓨터를 수색하고 법무부에 고발했다. 이 사건은 에드워드 스노든의 국가안보국(NSA) 기밀자료 폭로를 비판하는 등 정보기관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파인스타인 위원장을 강경한 태도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파인스타인 위원장은 당시 상원 연설에서 “중앙정보국의 수색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어긴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의회 상임위가 해당 피감기관의 예산 편성과 승인권, 감독권을 갖고 있어 상임위원장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보고서 공개를 불과 며칠 앞둔 상황에서도 반대 압력은 거셌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나서 미국의 국외 시설 및 기지에 대한 테러 위협 증가 등을 이유로 들며 공개 시점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보위원장직을 내년 1월 공화당에 넘겨줘야 하는 파인스타인 위원장은 더 미룰 수 없었다. 공화당 쪽이 보고서를 아예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파인스타인 위원장은 보고서 서문에서 “이 보고서 공개를 통해 미국이 다시는 비밀스런 무기한 구금과 강압적 심문 기법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올해 81살인 파인스타인 위원장은 민주당 소속 최고령 여성 의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보고서 작성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보고서 공개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9일 성명에서 “어느 국가도 완벽하지 않다”며 “그러나 미국을 특별히 강하게 만드는 힘 가운데 하나는 과거를 솔직하게 직시하고 결함을 인정한 뒤 더 좋게 변화시켜 나가려는 우리의 의지”라고 말했다.
워싱턴/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