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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볼티모어 흑인 폭동, 인종이 아니라 빈곤이다

등록 2015-05-08 19:57수정 2015-05-09 10:13

지난 4월29일 밤 볼티모어의 시위대가 경찰 최루가스통을 경찰에게 되던지려 하고 있다. 프레디 그레이의 지난달 28일 장례식 후 일어난 폭동 때문에 이달 4일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실행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4월29일 밤 볼티모어의 시위대가 경찰 최루가스통을 경찰에게 되던지려 하고 있다. 프레디 그레이의 지난달 28일 장례식 후 일어난 폭동 때문에 이달 4일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실행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토요판] 뉴스분석, 왜?
흑인폭동 1968~2015
▶ 지난해 8월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발생한 흑인 주민 소요가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로 번지고 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까지 선포됐던 볼티모어 폭동은 그 정점이다. 1968년 미국 전역 도시에서 벌어진 흑인 주민 폭동의 최대무대였던 볼티모어에서 다시 일어난 폭동은 47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빈곤에 얽힌 인종문제를 다시 노출했다. 그 역사를 살피며 미국 흑인 폭동의 원인을 따져보았다.

미국에서 2002년부터 6년간 방영됐던 텔레비전 범죄드라마 <더 와이어>는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다. 드라마는 단순히 경찰의 범죄 수사만을 다루지 않는다. 시즌 6까지 모두 60차례의 에피소드가 방영된 드라마는 각 시즌에서 마약 거래, 부두노조 등 항만 체계, 시정부와 관료주의, 학교 제도, 언론 등을 다룬다. 범죄나 사회문제는 우범자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와 세력이 공모한 결과다.

따라서 볼티모어는 단순히 일개 도시가 아니다. 미국 그 자체이자, 온 세상이다. <더 와이어>가 묘사하는 것처럼, 볼티모어는 미국의 사회문제를 응축한 대표적인 도시다. 낙후된 도심, 전통 제조업의 몰락, 사회 양극화가 가져오는 빈곤과 인종 문제는 결국 45년 만에 이 도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방위군을 투입하게 하는 흑인 주민폭동으로 폭발했다.

1957년 아칸소 리틀록 흑인학생 전학사건

47년 전인 1968년 볼티모어는 당시 미국 전역의 도시를 휩쓸던 흑인 도심폭동이 일어난 대표적 도시 중 하나였다. 흑인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로 촉발된 이 폭동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흑인민권운동의 분수령이었다. ‘킹 폭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흑인 도심폭동이 일어난 1968년을 기점으로 흑인 민권을 위한 법과 제도가 일단락됐다. 미국 의회에서 논란 속에서 계류 중이던 주거차별 금지 민권법은 이 폭동의 여파로 통과됐다. 이 민권법은 또 인종·종교·국적 등에 의거한 차별을 불법이자 연방 차원의 범죄로 규정했다. 이 민권법 통과를 계기로 미국에서 제도적인 흑백분리는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 폭동은 미국에서 문화적, 정치적인 흑백분리를 새롭게 탄생시킨 계기였다. 빈곤층 흑인과 중상류층 백인의 주거지는 도심과 교외로 나눠졌다. 흑인과 백인의 투표 성향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더욱 몰리게 된다. 미국은 이 폭동을 기점으로 진보적인 자유주의 운동이 쇠락하고, 정치는 보수화된다.

68년 폭동 전후의 볼티모어는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한때 수도였던 볼티모어는 뉴욕에 버금가는 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볼티모어는 1950년 인구가 94만여명으로 정점에 오르며 미국의 전성기인 50년대를 향유했다. 2차대전 동안 남부의 백인들이 볼티모어의 제조업 노동자로 와서 일자리를 찾았다. 남부 백인들의 도래는 남부와 북부의 경계선에 있는 대도시 볼티모어의 흑백분리 제도와 문화를 둘러싼 긴장과 대립을 강화했다.

공립학교에서 흑백분리는 위헌이라는 1954년 대법원의 ‘브라운 대 교육부’ 사건 판결은 흑인 민권운동을 촉발한 한 계기가 됐지만, 볼티모어에서는 흑백 대립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도심의 백인 노동자들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통합을 저지하기 위해 결집했다.

1957년 남부 아칸소의 주도 리틀록의 리틀록센트럴고등학교의 흑인 학생 전학 사건은 이 문제를 둘러싼 당시 미국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9명의 흑인 학생이 법에 따라 이 학교에 등교하려고 하자, 오벌 포버스 당시 아칸소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동원해 저지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은 흑인 학생들의 등교 저지에 동원된 아카소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바꾸고, 병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또 그는 자신이 사령관으로 지휘했던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적진으로 먼저 투입됐던 유명한 101공수사단 병력까지 리틀록에 파견해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지원했다. 9명의 흑인 학생들은 전학에 성공했지만, 오직 1명만이 졸업했다. 아칸소 주정부는 공립학교의 흑백통합을 추진하기보다는 공립학교 시스템 자체를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63년 6월11일 앨라배마대학교의 본관 정문 앞에 조지 월러스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가 직접 나타나, 이 학교에 입학 절차를 밟으려는 흑인 학생 2명을 저지했다. 월러스는 4개 초등학교에서도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직접 저지하기도 했다. 존 케네디 당시 대통령도 연방군을 파견해 앨라배마 학교들의 흑백통합을 밀어붙였다.

볼티모어의 백인 주민들은 196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월러스에게 표를 몰아줬다. 월러스는 이 경선에서 백인 노동자 표를 휩쓸며 남부 지역 주들에서 승리해, 린든 존슨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위협했다. 볼티모어의 백인 노동자 주민들은 더 나아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96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의 아성이던 남부는 서서히 공화당 지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1950년부터 줄기 시작한 볼티모어의 인구는 60년대 흑백 갈등을 거치면서 감소가 가속화됐다. 흑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크게 늘어난다. 1950년에 23.8%였던 흑인 인구는 1970년 46.4%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볼티모어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나, 도심의 제조업 공장들은 사라졌다. 의약과 금융 등 서비스와 지식 산업으로 바뀌었다. 백인 노동자들이 도심에서 사라졌다. 의약과 금융에 종사하는 중·상류층 백인들은 교외에 터전을 잡았다. 허드렛일을 하거나 실업 상태의 흑인들만 도심에 남고 더욱 몰려들었다.

1968년 볼티모어 흑인폭동은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한 분수령
그 여파로 흑백분리 철폐됐지만
중상류층 백인들 교외 정착하고
흑인만 도심 몰리는 새 분리 초래

볼티모어 흑인 비율은 약 63%
빈곤 상황은 미국 평균의 두배
볼티모어 경찰력의 48%가 흑인
폭동은 경찰력 탓에 발발했으나
내면 들여다보면 빈곤이 원인

68년 폭동은 어떻게 미국 정치지형 바꿨나

68년 폭동은 이런 새로운 흑백분리를 가속화하며, 볼티모어 도심의 공동화를 재촉했다. 4월6일부터 14일까지 8일 동안 계속된 볼티모어 폭동은 워싱턴, 루이스빌, 캔자스시티, 시카고와 함께 68년 폭동 중 가장 규모가 큰 폭동이었다. 6명이 숨지고, 700여명이 부상하고, 4500여명이 체포됐다. 1천곳이 방화됐고, 현재 시가로 7억7500만달러의 손해가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약탈과 방화를 당한 1천여개의 업소들 대부분이 영원히 문을 닫았다. 지금도 볼티모어 도심의 노스 애비뉴, 하워드 스트리트, 게이 스트리트,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등은 여전히 당시의 폭동 상흔을 간직한 채 황량하게 남아 있다. 볼티모어는 당시 폭동을 겪었던 많은 다른 도심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폭동이 일어난 많은 도시의 도심들이 25년이 지나도 거의 재건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 1990년 초부터 빌 클린턴 정부 아래서 미국이 최장기 호황을 구가하면서도 이런 도심들은 서서히 재개발에 들어갔을 뿐이다. 공동화된 도심들이 재개발되기 직전 워싱턴에 사는 백인 주민은 백악관에 있는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부인 힐러리뿐이라는 농담도 나왔다.

68년 폭동은 그해 대선부터 시작해 미국의 정치 지형을 바꾸기 시작한 계기였다. 볼티모어 폭동 당시 메릴랜드 주지사였던 스피로 애그뉴의 정치적 부상이 그 상징이다. 애그뉴는 폭동 때 볼티모어의 흑인 지도자들이 사태 진정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는 “나는 모든 흑인 인종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를 당신들에게 촉구한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머뭇거리고만 있다”고 흑인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애그뉴의 이런 발언은 흑인 지도자를 분노케 했지만, 단번에 보수적인 백인 주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리처드 닉슨 역시 애그뉴를 주목하고, 그를 부통령 후보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법과 질서’를 내세운 닉슨-애그뉴는 민주당의 아성이던 남부의 보수적 백인 표를 잠식하며, 민주당 후보 허버트 험프리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애그뉴는 닉슨과 함께 72년 대선에도 재출마해 당선되며 승승장구하다가 73년 수뢰 혐의가 걸려 사임했다. 인종 문제에서 온건파였던 애그뉴의 변신과 부상은 볼티모어 폭동이 낳은 정치적 산물이다.

68년 폭동을 계기로 미국의 인구 지형은 급속히 바뀌었다. 중·상류층들이 빠져나간 도시의 지방정부들은 재원 부족으로 도심 재개발에 엄두를 못 냈다. 공화당이 득세하기 시작한 연방정부 역시 득표에 도움이 안 되는 도심 주민들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기를 꺼렸다. 특히 미국의 신보수주의를 완성한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정부가 집권한 1980년대에 이런 현상은 절정에 달했다.

미국 동북부와 오대호 연안을 잇는 전통 제조업 지대는 이른바 ‘러스트벨트’(녹이 슨 지대)로 바뀌었다. 대신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플로리다를 잇는 이른바 ‘서니벨트’(햇볕 지대)가 부상했다. 서니벨트의 일자리를 찾아서 인구가 이동했고, 이는 80년대 이후 새로운 인종 갈등과 사회문제를 잉태했다. 서니벨트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생긴 새로운 일자리들은 양극화됐다. 첨단 지식산업이 만들어낸 소수의 고학력 일자리와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서비스 일용직이었다. 이곳으로 모여든 많은 흑인 주민들의 몫은 물론 서비스 일용직이거나, 반실업이라는 고용불안이었다.

1980년 5월 플로리다의 최대 도시 마이애미 폭동은 이런 조류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흑인 주민폭동의 시작이었다. 흑인 주민 아서 맥더피가 과속 단속에 걸려 도주하다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 4명에게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기소된 백인 경찰들이 무죄방면되자, 마이애미의 흑인 주거지 오버타운과 리버티시티에서 즉각 폭동이 일어났다. 5월17일부터 나흘 동안 계속된 이 폭동으로 모두 18명이 사망하고, 350명이 부상했다. 1억달러의 피해가 났다. 68년 폭동 이후 처음으로 주방위군이 투입되고, 통행금지가 선포됐다.

마이애미 폭동은 백인 경찰의 인종주의적 경찰력 집행과 이로 인한 흑인 주민의 사망으로 촉발되는 향후 흑인 주민폭동의 원형이 됐다. 68년 이후 최대 폭동이었으며, 이는 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전주였다. 로스앤젤레스 폭동 역시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용의자를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하는 장면이 대중한테 공개되면서 발발했다. 백인 경찰들은 무죄방면됐고, 폭동을 불렀다. 4월29일부터 6일간 계속된 폭동으로 53명이 숨지고, 2천여명이 다쳤다. 60년대 이후 최대 폭동이었으며, 사망자 수에서는 1863년 뉴욕 징집거부 폭동 이후 최대였다.

2001년 오하이오의 신시내티 폭동은 이런 인종 갈등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19살의 비무장 흑인 주민 티머시 토머스는 경범죄로 신시내티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사살됐다. 이미 신시내티 경찰은 흑인 주민에 대한 과도한 경찰력 집행으로 2명을 사망시켜 흑인 주민들과 긴장 상태였다. 흑인 거주지 오버더라인에서 나흘간 계속된 폭동에 가담한 흑인 주민들은 경찰을 집중 공격했다. 오버더라인 주민들의 중간소득은 8600달러로 신시내티 전체 주민 중간소득 2만6800여달러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했다.

미국은 긴 호황을 누린 1992~2008년까지 전후 어느 때보다도 흑인 폭동과 주민 소요 사건이 적었다. 하지만 서니벨트 지역의 마이애미와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전형적인 러스트벨트 지역인 신시내티 폭동은 호황과 상관없이 미국 전역 도심의 흑인 주민 문제가 내연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시장도 흑인, 경찰청장도 흑인인데…

2014년 8월9일부터 시작된 미주리주 퍼거슨의 흑인 주민 소요를 시작으로 최근 볼티모어 폭동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흑인 주민 소요와 폭동은 이를 말해준다. 최근 사태의 출발점인 퍼거슨 소요도 18살의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에 의해 체포 과정에서 사살되면서 촉발됐다. 곧 주민 소요가 일었고, 브라운을 사살한 백인 경찰이 11월24일 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으면서 전국적인 소요로 확산됐다.

최근 볼티모어 폭동으로 오기까지, 뉴욕과 시카고 등 여러 지역에서 흑인 주민에 대한 경찰의 인종주의적 경찰력 집행으로 소요가 발발했다. 그 정점인 볼티모어는 다시 시곗바늘을 외형적으로 68년 폭동 때로 돌려버렸다. 볼티모어 폭동 역시 인종주의적 경찰력 집행으로 발발했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빈곤이 원인이다.

68년 폭동 이후 볼티모어의 인구는 줄면서, 흑인 인구는 대폭 늘었다. 62만여명의 인구 중 흑인 비율은 약 63%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2014년 기준으로 미국의 빈곤선은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소득 2만3850달러다. 볼티모어 주민의 4분의 1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한다. 특히 아동의 37%가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한다.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6%, 전체 아동의 약 20%가 빈곤선 이하인 것에 비하면, 볼티모어의 빈곤은 두배에 육박한다.

볼티모어 경찰력의 48%가 흑인이다. 시장과 시의회 의장, 경찰청장이 흑인이다. 폭동의 발단이 된 흑인 주민 프레디 그레이의 사망과 관련된 6명의 경찰 중 3명이 흑인이며, 주범 역시 흑인이다. 단순히 인종 문제로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빈곤 문제는 1960년대 수준을 하회하고 있다. 68~69년에 15~65살의 빈곤 비율은 8% 내외까지 떨어졌으나, 2011년에 13.7%까지 올랐다. 볼티모어는 이런 미국의 빈곤과 양극화의 불만이 터지나온 가장 약한 고리였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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