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의 모습. 후보나 정당에 직접 연계되지 않은 단체인 ‘슈퍼팩’을 통해서 무제한 선거자금 기부가 가능해지면서 미국 억만장자들의 대선후보에 대한 기부도 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거액 기부는 보수적인 공화당 후보에게 집중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에너지· 금융 등 ‘큰 손’ 가문들
대선후보에 기부하며 대선판 흔들어
158개 가문이 절반기부…87%가 공화쪽
대선후보에 기부하며 대선판 흔들어
158개 가문이 절반기부…87%가 공화쪽
“우리는 우리나라의 커다란 죄악에 애도하고 슬퍼합니다. 수백만의 아기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신이여, 이 사람들을 악에서 멀어지게 해주소서.”
지난 8월 미국 텍사스주 시스코에 있는 교회 ‘제7일 야훼의 전당’의 목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낙태는 죄악이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동성애는 무거운 범죄이며, 성경은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한 경우에도 낙태는 죄악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기도를 한 목사의 이름은 패리스 윌크스(63).
<뉴욕 타임스>는 최근 미국 연방선거위원회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해보니, 6월까지 집계한 결과 대선후보 선거자금 전체 모금액 가운데 거의 절반을 158개 가문이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분석 자료에서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 가문이 패리스가 속해 있는 윌크스 가문으로 1500만달러(약 169억원)를 기부했다.
에너지·금융업서 부 일군 ‘큰손’
‘슈퍼팩’ 탄생하며 기부제한 풀려
NYT “슈퍼팩은 합법적인 뇌물” ‘셰일 에너지’ 거부 윌크스 가문
‘헤지펀드’ 갑부 머서 가문…
크루즈 상원의원 공개 지지 기부
거액 기부자들 87%는 공화당에
민주당에 기부는 소로스가 대표적
내년 대선 선거자금 모금액
올 6월까지 158개 가문이 절반 기부
윌크스 가문은 공화당 대선후보 중에서도 극보수적인 티파티 성향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을 지지한다. 크루즈 상원의원은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고 총기 소지 규제를 반대하는 인물이다. 패리스는 윌크스 가문이 크루즈 의원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서 <로이터> 통신에 윌크스 가문을 대표해서 “크루즈 의원이 자유시장의 도덕을 믿고 우리나라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며, 어머니 자궁에서 살해당하지 않을, 태어나지 않은 이의 권리를 믿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로이터>가 수집한 패리스의 설교를 살펴보면 패리스의 보수 성향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패리스는 동성애가 “아동성애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는 신의 뜻이라고 설교한 적도 있다. “신이 극지가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기를 원하면 그대로 뒀을 것”이라고 했다.
윌크스 가문은 미국 대선 선거자금 판도를 주도하는 기부자들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는 거액 기부자들 중에 공화당에 기부한 가문이 전체의 87.3%이고, 재산을 에너지산업과 금융업에서 축적한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상속 재산보다는 스스로 축적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이 가문의 패리스와 동생인 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벽돌공으로 일했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시스코 주민 중에는 윌크스 형제가 자동차 매장에서 외상을 구걸하다시피 요청했던 일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윌크스 형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텍사스 등에 불어닥친 셰일 에너지(모래와 진흙이 쌓여 단단히 굳은 셰일층에서 개발·생산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개발 열풍에서 부자가 될 기회를 잡았다. 2002년 셰일 석유와 가스를 개발하는 업자들에게 트럭 등을 제공하는 ‘프랙 테크’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회사는 셰일 열풍 덕에 번창했다. 2011년 자신들이 보유한 회사 지분을 싱가포르 국부펀드 등에 32억달러(3조6112억원)에 매각해 억만장자들이 됐다. 동생 댄도 장인이 설립한 보수 교회에 다니고 있다. 형제는 텍사스와 아이다호, 몬태나에서 대농장을 사들였고, 보수적 교회 운동과 셰일 에너지 개발을 제한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다.
크루즈 의원 등을 지지하는 모임에 1130만달러(약 127억원)를 기부해 선거자금 기부 2위에 오른 머서 가문도 최근 거액 기부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머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 로버트 머서(69)는 거액 기부자들이 부를 일구는 주요 통로인 금융업에서 거물이 된 경우다. 뉴멕시코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그는 아이비엠(IBM) 연구소에서 자동 외국어 번역 프로그램을 연구하다가 헤지펀드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에 발탁된 인물이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베트남전쟁 때 국방부 암호해독관으로 일했던 제임스 사이먼스가 1982년 설립한 회사로, 주식 거래 등의 패턴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투자하는 헤지펀드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대표 펀드인 메달리온은 지난 20여년 동안 연평균 35%의 수익률을 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주로 수학과 물리학 분야 박사들을 고용했다. 로버트도 수학적 재능 때문에 고용된 경우였으며 현재 그는 이 회사 공동 최고경영자(CEO)다.
로버트 머서는 윌크스 가문의 패리스와는 달리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컴퓨터언어학협회 평생공로상 수상 연설에서 “1시간 동안 연설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내가 한달 동안 이야기할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또 “나는 밤늦은 시간 연구실의 고독한 분위기가 좋다. 에어컨 냄새와 프린터 소리가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헤지펀드 산업에 관한 책인 <신보다 많은 돈>이라는 책에는 그에 대한 상사들의 평가가 나온다. 이 책에서 상사들은 그를 농담조로 “얼음처럼 차가운 포커 플레이어” “자동 기계”라고 표현했다는 대목이 있다. 선거 재정 전문가인 브래들리 스미스는 그에 대해서 “원래는 매우 주목도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로버트 머서의 성격은 조용하지만 그가 쓰는 돈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오리건주 하원의원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 나선 민주당 피터 디파지오 전 의원을 반대하는 쪽에 65만달러를 기부했다. 이 돈은 디파지오를 비판하는 광고 게재 등에 쓰였다. 디파지오는 자신이 헤지펀드에 더 많이 과세를 하자는 주장을 해서 공격 대상이 됐다고 생각한다. 디파지오는 로버트 머서에 대해서 “그는 극우의 후원자”라고 평가했다.
윌크스 가문과 머서 가문이 공화당 대선 후보에 거액을 기부해 대선판을 흔들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슈퍼팩’이 있다. 두 가문이 크루즈 의원에게 직접 선거자금을 기부한 게 아니라, 크루즈 의원을 지지하는 이른바 슈퍼팩에 기부를 했다. 개인이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정치인에게 직접 기부할 수 있는 액수는 2600달러로 제한되지만, 슈퍼팩을 통하면 무제한 기부가 가능하다.
미국에는 원래 ‘정치행동위원회’(PAC· Political Action Committee)라 불리는 단체가 있었다. 특정 정치인이나 법안 등에 대해 지지·반대 의사를 나타내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데, 원래 자금 모금에 제한이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연방대법원은 후보나 정당에 직접 연계되지 않은 단체에는 무제한 선거자금 모금을 가능하게 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초대형 정치행동위원회인 이른바 슈퍼팩이 탄생했다. <뉴욕 타임스>는 올해 초 사설에서 슈퍼팩에 대해 “합법적인 뇌물의 형태”라며 “슈퍼팩이 미국 정치에 독약의 위력을 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에너지업계 거부인 코크 형제가 올여름 공화당 주요 대선후보를 리조트에 호출한 일은 슈퍼팩을 통해 거액 기부자들이 대선판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찰스 코크(80)·데이비드 코크(75) 형제는 자신들이 후원하는 정치자금 모금 조직인 ‘프리덤 파트너스’를 통해 한 해 두 번 호화 리조트에서 억만장자들의 모임을 여는데, 지난 8월에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호화 리조트 세인트리지스에서 개최하는 모임에는 특별하게 공화당 대선 후보 중 다섯명을 초청했다. 다섯명만 선별해 집중 지원하겠다는 뜻이었다.
코크 형제는 올해 초 대선을 위해 8억9900만달러(약 1조136억원)를 모금할 예정이라고 이미 밝혔기 때문에,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이들의 리조트 모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공화당 대선후보인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칼리 피오리나 전 휼렛패커드 최고경영자,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 초청받은 전원이 리조트 모임에 참석해 부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개인 회사인 코크 인더스트리를 소유하고 있는 형 찰스와 동생 데이비드는 각각 400억달러(45조1000억원)가 넘는 재산을 보유한 거부들이다. 코크 형제는 미국이 규제가 적은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헤리티지재단 같은 보수적 연구소에 기부를 해왔다. 코크 형제가 2004년 설립을 주도한 연구소인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은 티파티를 후원하는 주요 단체다. 코크 형제가 주도한 올여름 호화 리조트 모임에는 400여명이 참석했다.
1000만달러(약 110억원) 이상 거액 기부자들을 크루즈 의원 쪽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부시 가문과 기업들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 거액 기부 가문 다수를 확보했으며, 전체 액수로 보자면 후보들 중 가장 많은 1억850만달러(약 1223억원)를 모금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대표적인 예가 부시를 지지하는 슈퍼팩에 200만달러 이상을 기부한 헌트 가문이다. 헌트 가문은 미국에서 가장 큰 개인 석유회사인 헌트 오일을 설립했던 에이치 엘 헌트의 아들인 레이 헌트(72)가 중심이다. 이 가문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지지에 이어 동생인 젭 부시도 지지하고 있다. 레이는 세계 은 시장을 뒤흔들었던 1980년대 헌트 형제 은 투기 사건의 주인공들인 벙커·허버트 헌트와 형제간이다. 벙커와 허버트는 시세차익을 노리고 은을 대량으로 사재기했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은 가격은 폭락했는데, 이 사건은 세계 원자재 시장에서 손꼽히는 대형 투기 사건이었다.
민주당 쪽에도 거액 기부자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헤지펀드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85)로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슈퍼팩에 100만달러가량을 기부했다. 소로스는 조지 부시 정권 시절 부시 정권이 미국을 영구적인 전쟁 상태에 밀어넣었다며 부시 퇴진 운동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심이 되었다고 말했을 만큼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깊다.
그러나 소로스처럼 민주당을 지지하는 거액 기부자는 공화당에 견주면 확연히 적다. 소로스와 같이 퀀텀 펀드에서 1992년 영국 파운드 폭락에 투자했던 스탠리 드러큰밀러는 젭 부시 전 주지사와 크리스 크리스티 주지사 쪽에 30만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슈퍼팩’ 탄생하며 기부제한 풀려
NYT “슈퍼팩은 합법적인 뇌물” ‘셰일 에너지’ 거부 윌크스 가문
‘헤지펀드’ 갑부 머서 가문…
크루즈 상원의원 공개 지지 기부
거액 기부자들 87%는 공화당에
민주당에 기부는 소로스가 대표적
내년 대선 선거자금 모금액
올 6월까지 158개 가문이 절반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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