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스터트 전 하원의장. (AP/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최장수 연방 하원의장 역임
5명 소년 추행 혐의…공소시효 지나 기소는 안 돼
5명 소년 추행 혐의…공소시효 지나 기소는 안 돼
미국에서 하원의장은 대통령에 이은 실질적인 제2의 권력자다. 대통령도 하원의장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국정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이런 막강한 권력자가 제자 성추행범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 정치사에서 최악의 스캔들이라 할 수 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8년간이나 미국 하원의장으로 재직한 데니스 해스터트(74)가 27일(현지시각) 일리노이 북부지구 연방지법으로부터 금융신고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15개월과 2년간의 보호관찰 처분을 선고받았다. 그는 과거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감추려고 350만달러를 불법으로 지불하려다 기소됐다. 해스터트는 시카고의 교외인 요크빌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65~1981년 5명의 소년을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재판에서는 공소시효가 지난 성추행 혐의로는 직접적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해스터트는 체육교사 출신으로서 하원의장까지 오른 인생 역정과 청렴한 이미지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이날 법정에는 해스터트의 피해자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신원을 밝히고 증언했다.
현재 두 아이의 아버지인 스콧 크로스(53)는 36년 전 일을 증언하며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나는 해스터트 코치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어요. 저는 체중 감량을 하느라고 늦게까지 남았습니다. 어느날 연습이 끝난 뒤 저는 해스터트와 락커룸에서 둘만 남았습니다. 해스터트는 나에게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내가 연습대 위에 눕자, 해스터트는 나의 셔츠를 벗기고 성적으로 나를 만졌습니다. 나는 그가 하는 행동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나갔고, 누구에게도 이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17살 소년으로 나는 충격에 빠졌고, 왜 해스터트 코치가 나를 선택했는지를 알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크로스가 증언하는 동안 해스터트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크로스는 그 후 “고통과 수치,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못했다. 그는 몇년 전 해스터트의 행각이 드러나자, 비로소 형과 부인에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몰래 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피해자이나 사망한 스티브 레인볼트의 누이 졸린 버지도 이날 증언했다. 버지는 레인볼트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고, 부끄럽고, 충격을 받았는지”를 해스터트 앞에서 말했다. 버지는 오빠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하기를 원한다며, 해스터트는 “최악의 악몽”이라고 말했다.
검찰 기록에 따르면, 해스터트는 “비밀(성추행)이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언론의 조명을 받는 공직에 들어가는 것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실제로, 해스터트의 추행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그의 제자들, 레슬링 팀 학생 선수들, 동료 등은 자신들은 해스터트가 추행을 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다.
해스터트의 범행이 알려진 것은 3년 전이다. 연방수사국(FBI)과 국세청은 해스터트가 의심스런 돈을 인출하고 그 이유를 은행 직원들에게 거짓으로 밝혔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가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줄 보상금을 마련하려고 여러 은행 계좌에서 1만달러 이하씩 모두 100만달러 가까이 인출했다. 미국에선 1만달러 이상을 출금할 때는 국세청에 보고해야 하는데, 이를 피하려고 돈을 쪼개서 인출한 것이다.
처음에 수사관들은 해스터트가 협박을 받아서 갈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했다. 해스터트도 수사관들에게 한 사람이 자신을 성추행 혐의로 협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스터트는 그와 통화한 녹음도 제시했다. 수사관들이 그 사람을 불러 조사하자, 진실이 드러났다. 그가 믿을만한 주장을 하고 있고, 다른 피해자들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10대였을 때 해스터트로부터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해스터트는 자신의 성 범죄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날 법정에서 “아주 수치스럽다”며 “40여년 전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 합의를 하려고 고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 중 일부를 학대했다”고 인정했다. 또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상처주고 오도했던 이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며 “그들은 나에게 의지했는데, 나는 그들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법정에서 그의 이런 성추행 범행 시인은 토머스 더킨 판사가 그에게 관련 범행을 인정하냐고 묻자 나온 것이다. 더킨 판사는 해스터트를 “연쇄 아동추행범”이라고 규정했다. 해스터트는 이날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두했다.
미 하원은 그가 지난해 금융신고법 위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뒤 의사당에 전시된 역대 하원의장 사진 중 그의 것을 즉각 치워버렸다. 미국 역사상 하원의장을 지낸 이가 형사 범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해스터트는 1980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처음 선출직에 진출한 뒤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자신을 정계로 이끈 인사가 병으로 은퇴하자, 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그는 공화당 역사상 최장수 하원의장이란 영예를 누렸으나, 이제는 공화당의 최대 수치로 변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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