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현지시각) 브라질 상원에서 탄핵이 확정된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대통령궁 집무실 바닥에 내려져 있다. 브라질리아/로이터 연합뉴스
신흥국 거품의 폭발,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신화의 몰락, 남미 좌파 벨트의 붕괴?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의 탄핵 가결로 브라질 위기가 절정에 오르자, 국내에선 이 사태를 좌우파 이데올로기로 양단하는 특유의 분석법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중남미를 석권한 ‘좌파 정권 벨트’의 몰락이라는 분석이다. 유럽이나 남미 등에서 정권교체가 있을 때마다 국내에선 이를 좌우파 몰락과 부상이라는 틀로 보는 경향이 짙다.
지난해 말 아르헨티나에서 우파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당선되고,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에서 경제위기가 격화되자, 남미 좌파 정권 벨트의 몰락은 기정사실로 국내에 보도되고 있다. 좌파가 집권했던 브라질,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에서 ‘퍼주기식 정책’으로 경제가 부실화돼 좌파 정권들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았다는 주장이다.
현재 중남미 20여개 국가 정권을 좌우파로 굳이 구분한다면, 우파 정권은 멕시코, 온두라스,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페루 정도다. 앞으로 진행될 선거에서 우파 정권의 집권이 추가될 것으로 보이나, 남미 전체를 우파 일색으로 뒤집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도좌파 노동자당의 대통령이 탄핵당한 브라질이나, 지난해 총선에서 우파가 승리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처한 베네수엘라에서도 막상 선거가 치러지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놓고 서방 언론들은 2000년대 이후 원자재 가격 거품에 의한 신흥국 경제의 부상과 몰락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바라본다. 세계 여론 주도층이 기고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를 보면, 2000년대 이후 부상한 신흥국 경제, 특히 ‘브릭스 신화의 종언’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 경제 부상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자, 원자재가 풍부하고 비교적 시장이 큰 브릭스 국가들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신흥국 경제 부상의 상징이 됐다. 특히 브라질이나 산유국 베네수엘라 등에선 중국이라는 새로운 거대 구매자가 등장하자, 그동안 미국 등 서방에 의해 독점구매되던 원자재 가격 결정력도 커졌다. 이런 추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의 경기부양책이 지속된 2010년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 브라질에선 석유와 철광석, 콩 등의 수출 가격이 2~4배까지 폭등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내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정권이나 브라질의 룰라 전 정권은 이를 바탕으로 분배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석유값이 4분의 1 수준까지 토막나는 등 원자재 가격이 전반적으로 폭락하자, 그동안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브릭스 국가들이나 신흥국 경제는 선진국보다 심한 수축에 들어갔다. 이는 특히 브라질, 러시아, 남아공에선 통화가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통화위기를 몰고 왔다.
또 브라질, 남아공, 베네수엘라가 2010년 이후 대공황에 준하는 경기침체를 겪는 것은 이들 국가의 거버넌스, 즉 정치·경제·사회 운영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영향도 크다. 안정적인 거버넌스가 없는 상태에서 실시된 복지·분배 정책은 재원이던 원자재 가격 거품이 빠지자, 서민과 경제 전반에 더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브라질과 베네수엘라가 ‘좌파 포퓰리즘’으로 비판을 받는 지점이 있다.
칠레 역시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보다는 비중이 작으나, 구리 등 원자재 수출이 경제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칠레는 브라질, 베네수엘라와 달리 2000년대 이후 안정된 중도좌파 정권을 유지하며 건실한 분배와 성장을 이루는 경제를 영위하고 있다. 이는 칠레가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안정적이고 건실한 거버넌스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 전후 벌어진 신흥국 경제의 부상과 몰락을 보여준다. 이를 놓고 투자자인 워런 버핏은 “물이 빠질 때에만 누가 벌거벗고 수영했는지 알 수 있다”고 비유했다. 미국 대서양위원회 선임연구원인 안데르스 오슬룬드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브릭스 국가 몰락과 신흥국 경제 침체를 ‘브라질 증후군’이라고 명명하고, “원자재 가격 거품이 신흥국 시장의 심각한 거버넌스 실패를 가리는 무화과 나뭇잎이었다”고 지적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