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15주년을 맞은 11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국립 9·11 테러 추모박물관 인근에 있는 희생 소방관 추모의 벽 앞에서 한 시민이 꽃을 어루만지고 있다. 뉴욕/신화 연합뉴ㅅ
9·11 테러가 일어난 지 15년이 흘렀다. 11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곳곳에선 테러 희생자를 기리는 추념행사가 숙연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유가족과 생존자와 시민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날의 비극을 되새기며 서로를 위로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5년 전 테러범들이 납치한 미국 비행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처음 충돌한 시각인 오전 8시46분에 맞춰 백악관에서 묵념을 한 뒤, 버지니아 주 알링턴의 국방부(펜타곤)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앞서 10일 백악관 주례연설에서 “지난 15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며, 알카에다 박멸과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안보 강화, 테러 집단의 변화와 대응 등을 언급했다. 그는 그러나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들, 우리를 미국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핵심 가치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우리의 힘은 다양성과 모든 재능의 환대, 인종·성별·신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에서 나온다”며 “이런 가치들을 지킨다면 미국을 더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 조직원들은 미국 민항기 4대를 납치해 각각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 인근 국방부 건물(펜타곤)에 충돌했다. 테러의 직접 사망자만 2996명에 이른다.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 수천명은 이날 뉴욕 무역센터 빌딩 터에 새로 건립된 ‘국립 9·11 테러 추모박물관’(메모리얼 플라자)에 모여 추모행사를 열었다. 침묵의 시간, 주변 성당과 교회들의 타종, 그리고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전통적인 방식은 올해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치열한 대선 경쟁을 펼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도 이날 하루만큼은 텔레비전 광고를 포함한 일체의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뉴욕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 공식 추모행사에서 정치인들에게는 희생자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관례는 올해도 지켜졌다.
이와 함께 9·11 테러 당일의 급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들도 잇따라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영국 온라인매체 <인디펜던트>는 10일 미군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자살특공대처럼 ‘가미카제 돌격’을 각오했던 여군 조종사의 회고담을 전한 2011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를 다시 소개했다. 미군의 1세대 여성 전투기 조종사 중 한 명인 헤더 페니 예비역 소령(당시 중위)은 4번째 피랍 민항기가 워싱턴으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자신의 F-16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켰다. 가장 먼저 요격 임무를 받고 출격한 2대의 전투기 중 하나였다. 미사일은커녕 기관총탄도 없는 비무장 상태였다. 통상 1시간 정도 걸리는 무장 탑재를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페니 중위는 이제 막 2주간의 공중전 훈련을 마친 신참 조종사였다. 페니는 당시 두번째 빌딩이 공격받자 ‘전쟁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고 전했다. 그는 “(피랍 민항기를) 격추할 수 없었기에, 비행기로 돌진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가미카제 조종사가 되려 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충돌 직전 조종석 사출장치로 탈출할 때, 격추에 실패하는 상황이 일어난다면 내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으로 향하던 이 비행기는 승객과 테러범의 격투 끝에 펜실베이니아주에 추락해 페니 중위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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