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미국 상원에서 열린 ‘9·11 소송법’ 재심 표결에서 97 대 1이라는 표차로 법안이 통과됐다. 사진은 당시 표결 현장을 중계했던 미국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 <시스팬2>(C-SPAN2)의 화면 갈무리. 워싱턴/AP 연합뉴스
9·11 테러 희생자 유가족이 테러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9·11 소송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이 의회에서 뒤집혔다. 의회에서 대통령 거부권이 기각된 것은 오바마 대통령 임기 중 처음 있는 일이다. 법리적 해석과 관련된 논란에 더해 임기를 넉 달여 남긴 오바마 대통령의 레임덕 역시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 상원과 하원은 28일 열린 ‘9·11 소송법’ 재심 표결에서 각각 97 대 1 그리고 348대 7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기각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다시 통과시키려면 상·하원 모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2009년에 처음 발의된 이 법안의 공식 명칭은 ‘테러행위 지원에 대항하는 정의’다.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테러로 미국인들이 피해를 봤고 여기에 외국 정부기관이 연루되어 있다면, 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소송을 허용하기 위해 국외 국가기관에 면책 특권을 주도록 한 ‘외국주권면책특권법’을 수정한 것이 뼈대다. 이 법률에 따르면 테러 지원이 의심될 경우 연방법원에 외국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이 허용되며, 미국 정부가 연루되어 있다면 정부 역시 소송의 대상이 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8일 미국 버지니아주 포트리에서 <시엔엔>(CNN) 방송 주최로 열린 타운홀 미팅에 참석해 웃어 보이고 있다. 포트리/AP 연합뉴스
의회에 공식 서한을 보내며 법안 반대 의사를 피력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의원들이 충분한 이해나 토론 없이 위험한 선례를 남기는 법안에 투표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시엔엔>(CNN) 방송이 주최한 타운홀 미팅에서 “의회 선거를 바로 앞두고 9·11 테러 유가족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투표를 한 의원으로 알려진다면, 표결하기 힘든 투표였을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잘못된 법안이라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오는 11월8일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의회 선거를 앞두고, 의원들이 유권자들의 테러에 대한 우려를 의식해 성급하게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된 지 1시간도 안 돼 상원의원 28명은 이번 법안과 관련된 논란을 줄이기 위해 추가적인 입법 활동을 할 의지가 있다는 서한에 서명하기도 했다.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법률·정치적 지형도 바뀔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스티븐 블래덱 텍사스대 법학 교수는 “이 법안은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9·11 테러만을 특정하지 않는다”며 “관련이 없는 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미국 법정에서 줄줄이 제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외국 정부 역시 미국의 면책 특권을 문제삼을 수 있다. 외국에서도 미국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존 브레넌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개인 성명을 통해 “국가의 면책 특권에 영향을 미치는 입법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위험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의회의 거부권 기각으로 퇴임을 얼마 앞둔 지금까지 꾸준히 50%의 지지율을 유지해왔던 오바마 대통령도 적잖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하원 모두 공화당 다수인 상황에서 대다수의 민주당 의원들도 거부권 반대에 가세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한편, 사우디 정부는 ‘9·11 소송법’을 두고 사우디는 테러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9·11 테러조사위원회도 사우디 정부가 테러 기구를 지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