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동시다발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남부 상공이 검은 연기로 뒤덮인 모습. 뉴욕/AP 연합뉴스
미국 의회가 ‘9·11 소송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은 뒤 미국 정가와 외교 전선에 후폭풍이 거세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반발하고, 미 행정부는 우려하고, 미 의회는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사우디 외무부는 29일 늦은 오후(현지시각) 공식 성명을 내어 “미국의 ‘9·11 소송법’이 국제관계에서 수백년 동안 통용돼온 ‘주권면책’ 원칙을 훼손할 것”이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아랍 위성방송 <알아라비야>가 사우디 국영 통신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의회가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한 바로 다음날이다. 주권면책이란 ‘국가 평등’의 원칙에 따라 특정 국가가 다른 나라 법원의 피고가 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한다.
사우디 외무부는 성명에서 “이 법안이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부정적 양향을 미칠 것”이라며 “많은 나라들뿐 아니라 이 법안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조차도 9·11 소송법안에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9일 미국 의회는 9·11 테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테러행위 후원자들에 대한 정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법은) 위험한 전례를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지난 24일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갑자기 개인 소송에 직면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미 의회는 나흘만인 28일 법안 재심 표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기각해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이 행사한 법안 거부권이 의회에서 다시 뒤집힌 것은 임기중 처음이다. 의회가 대통령의 법안 서명과 발효를 강하게 압박한 셈이다.
지난 28일 미국 의회 상원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9·11소송법’에 대한 재의결 투표에서 찬성 97-반대 1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모습이 (미국케이블채널네트워크)의 화면에 비치고 있다. 워싱턴/ AP 연합뉴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에선 알카에다의 동시다발 테러로 2996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당시 4대의 민항기를 납치해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 조직원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사우디가 사실상 테러를 후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정가에선 벌써부터 의회가 9·11 소송법의 파장을 예상치 못하고 너무 나간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오바마 대통령은 28일 <시엔엔>(CNN) 방송에 출연해 의회가 자신의 거부권을 뒤집고 법안 발효를 밀어붙인 것은 “정치적 투표”이며 “실수한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테러 희생자들은 지원과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행정부가 피해자 보상기금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라며 “그러나 사우디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 브레넌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28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미국의 핵심동맹인 사우디가 이 법을 어떻게 해석할지 우려된다”며 “만일 이 법이 미국의 테러격퇴전의 최고 파트너로 남으려는 사우디의 의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의회는 뒤늦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수습책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9·11 소송법의) 수혜자가 누군지는 모두가 알았지만 국제관계 측면에서 부정적인 면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며 “이 법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공화당)도 “해외에서 활동하는 미국 요원들이 소송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회가) 더 할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의회가 법안 수정, 또는 폐기 검토 가능성까지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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