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 근처에서 시민들이 백인 민족주의 성향의 <브레이트바트>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배넌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수석 고문으로 지명한 것을 비판하며 “백인 우월주의를 백악관에서 몰아내라”고 쓴 펼침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자신의 당선에 기여한 ‘대안우익’(Alt-right)들을 서둘러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이 모임에서 ‘하일 트럼프’라는 나치식 경례,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비난 등 미국 사회의 최대 금기를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한 연방정부 건물에서 대안우익단체인 국가정책연구소의 콘퍼런스가 열렸다. 11시간에 걸친 이날 모임의 마지막 연사인 리처드 스펜서 국가정책연구소장은 유대인을 비난하고 독일어 원어로 나치 선동 문구를 인용했다. 미국은 “태양의 아이들”인 백인의 소유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던 정복자이던 (백인) 인종이 이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서 ‘정체성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연설이 끝나자 몇몇 청중은 나치식 경례를 했고, 스펜서도 “하일, 트럼프! 하일, 빅토리!”라고 외쳤다. 이 장면이 언론에 보도돼 비난이 들끓자, 트럼프는 22일 <뉴욕 타임스> 편집진과의 회동에서 “그들을 비난한다”며 서둘러 선 긋기에 나섰다.
대안우익은 한국의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처럼 인터넷에서 주로 활동하며, 기성체제에 대한 거부와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반이슬람, 국수주의, 성차별주의, 백인우월주의, 반이민 등이 혼재된 새로운 우파 조류다. 이번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지지운동을 펼치며 형성됐다.
스펜서는 이날 모임에서 ‘대안우익’ 용어는 자신이 만들었다며, 대안우익의 핵심 이념은 ‘백인 정체성’이라고 규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백인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백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수적으로도 소수인종에게 밀리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백인들이 ‘백인 정체성’을 정치의 중심 의제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에릭 코프먼 영국 런던 버크벡대학 교수는 ‘백인 민족주의’에 대해 “백인이 수적으로 우위에 서고,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소개했다.
스펜서는 트럼프를 대안우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심리적 유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안우익이나 트럼프주의 운동 중심에 ‘백인 정체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이민 사이트 <브이데어>의 창설자인 피터 브라임로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와 배넌은 대안우익이 아니다”라며 “다만 그들은 대안우익이 가장 우려하는 이민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기’(Political Correctness)라는 두 사안을 적절히 낚아채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백악관 최요직인 수석전략가 겸 수석고문에 대안우익 매체 <브라이트바트 뉴스> 운영자 스티브 배넌을 기용함으로써, 논란은 커졌다. <브라이트바트>는 대선에서 <인포워즈> 등 다른 대안우익 매체들과 함께 기성체제나 민주당을 극렬히 공격하는 ‘페이크 뉴스’(허위보도)를 양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케냐 출생 무슬림이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는 흑인종 폭동의 또다른 이름이다’, ‘불법체류자 중남미계 미국 태생 아이들도 추방해야 한다’ 등이 이들의 주장 또는 견해다. 배넌은 2015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 최고경영자 중 3분의 2가 아시아 출신”이라며 고도의 숙련기술자 이민도 미국 문화에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에서 대안우익이 어느 정도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함의를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뉴욕 타임스>와의 회동에서 배넌에 대해 “그를 인종주의자나 대안우익, 그런 것들로 생각했다면, 그를 기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브라이트바트>는 단지 간행물”이라고 옹호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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