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차이잉원 대만 총통 간의 지난 2일 깜짝 전화통화가 고도의 계산된 전략적 행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트럼프가 3일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주요 지지자들과의 파티장에 도착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모습. 롱아일랜드/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의 전화통화로 미-중 관계에 ‘폭탄’을 던졌지만, 트럼프의 파격적 외교 행보는 그의 대통령 당선 이후 자주 있었다.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강조해 온, 미국같은 대국 외교에선 전례가 없었던 파격 외교행보를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2일(현지시각)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통화를 했다. 미국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대만 총통과 통화를 한 것은 지난 1979년 양국 수교가 끊어진 이후 37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사진은 지난 10월10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쌍십절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 타이베이/AP 연합뉴스
트럼프는 차이잉원 총통과 통화했던 지난 2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도 통화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통화 뒤 ‘트럼프가 마약과의 전쟁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두테르테는 ‘마약과의 전쟁’이란 이름 아래 5천명을 사살해 국제사회로부터 인권탄압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트럼프는 두테르테 쪽의 국내정치용인 ‘마사지 브리핑’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일(현지시각) 밤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와 통화하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 대통령 특별보좌관 페이스북 캡처 사진. 연합뉴스
앞서 지난달 30일에는 철권통치로 비난받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의 통화 뒤에도 카자흐 정부는 ‘트럼프가 카자흐스탄 지도자 밑에서 기적과도 같은 환상적인 성공을 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1989년부터 카자흐를 통치하고 있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인권단체들로부터 언론·집회 자유 제한과 고문 시행 등 여러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어, 트럼프의 발언은 독재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같은날 트럼프는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와 통화하면서도 총리를 “굉장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파키스탄 방문 초청에 대해 “환상적인 나라에 기꺼이 방문하겠다”고 말했다고 파키스탄 쪽이 밝혔다. 상대국 방문 수용은 가장 강력한 우호적 외교 메시지다. 그러나 이는 파키스탄과 앙숙 관계인 인도를 신경쓰지 않은 발언으로, 조지 부시·버락 오바마 행정부로 이어지는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 중시 외교 기조를 허무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트럼프는 또 당선 직후인 지난달 10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외국 지도자들 가운데 10번째 순번으로 통화했다. 전통적으로 미-영 동맹의 최우선 순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 대통령 당선자는 영국 총리와 첫번째로 통화를 해왔다. 기존 외교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트위터를 통해 개인적 친분인 있는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 영국 독립당 과도대표가 주미 영국대사가 됐으면 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 전 과도대표 나이절 패라지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에이피>(AP) 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날 패라지는 브렉시트나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가 승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런던/AP 연합뉴스
이런 파격 행보에 비하면, 지난달 17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면담시 딸 이방카 부부가 배석한 것은 애교에 가깝다. 당시 트럼프 쪽은 공과 사, 사업과 정부간 경계가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금까지 보인 트럼프의 파격외교 행보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외교 프로토콜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당선 뒤 통화순서를 보면, 이집트-아일랜드-멕시코-이스라엘-터키 순이다. 영국 등 전통적 외교문법에 익숙한 동맹들 입장에선 판을 흔드는 것으로 비춰져 몹시 당황스러울 수 있다.
또 양쪽이 통화나 회담 뒤 조율된 내용을 공개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공개해도 신경쓰지 않는다. 다른 동맹국이나 제3자 입장에서 보면 트럼프의 진의에 대한 궁금증과 의구심,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수 있다.
세번째로, 필리핀이나 카자흐 정부가 공개한 통화내용이 맞다면, 트럼프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옹호와 같은 ‘가치 외교’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각국 일은 각자 알아서 하라’는 고립주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트럼프가 취임하고 나면 국무부나 국방부 등 미 행정부의 기존 시스템이 즉흥적이거나 파격적인 그의 행보에 일정하게 제동을 걸 수는 있다. 하지만, 차이잉원과의 통화 이후 쏟아지는 비판에 대한 트럼프의 반발 등 후속 반응을 보면, 그가 당장 관료조직에 ‘길들여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행동이 ‘본능적 계산’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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