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아리엘 도르프만 미국 듀크대 교수가 최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해 “미국인들은 이제야 칠레인들의 기분을 알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해 19일치에 실렸다. 기고문에서 40여년 전 발생한 칠레 쿠데타를 언급한 도르프만은 “비슷한 두 사건을 보는 나의 심정은 기쁘기보다는 모순적”이라며 “앞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르프만은 기고문에서 “1970년 10월22일, 아내인 안젤리카와 함께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집에서 라디오 긴급 속보를 들었다. 레네 슈네이데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레네 슈네이데르는 당시 칠레의 육군참모총장으로, 미국의 칠레 내정간섭에 대항해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던 인물이다. 도르프만은 “아내와 나는 동시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짓이다!’라고 외쳤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미국 정부가 칠레인들의 의지를 꺾으려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중남미에서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 출신 대통령이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광산 국유화나 사회복지정책을 비롯한 개혁정책을 폈지만, 동시에 칠레의 기득권 세력과 미국 정부의 정권 찬탈 기도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칠레를 둘러싸고 경제적 봉쇄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군부를 사주해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공작을 펼쳤다.
도르프만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과 당시 미국 정보기관이 펼쳤던 공작이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도르프만은 “아옌데는 갓 집권한 대통령이었지만, 선거 전부터 미국 정부의 공작과 루머에 맞서 싸워야했다(오늘날 우리는 이를 ‘가짜 뉴스’라고 부른다)”며 “미국의 공작은 당시 과테말라와 이란, 인도네시아, 브라질처럼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는 지도자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고, 이후 군부는 17년간 칠레를 통치하게 된다. 이 시기를 “고문과 사형, 망명과 추방이 이어졌던 17년”이라 표현한 도르프만은 “최근의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상황을 볼 때, 라이벌 국가인 러시아가 자신들의 전략을 따라했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외치는 미 중앙정보국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밝혔다. 도르프만은 이어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다. 미국 시민권자로서, 나는 또 다시 극악한 간섭의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6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당선 감사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무대에 올라 박수를 치고 있다. 올랜도/AP 연합뉴스
도르프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태도도 지적했다. 도르프만은 “트럼프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논란을 두고 ‘이상하다’, ‘음모론에 불과하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늘어놓는데, 이 역시 40여년 전 칠레인들이 들었던 말들”이라고 지적하며 “칠레 쿠데타의 배경에 미 중앙정보국의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엔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도르프만은 이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나 정보기관이 아닌 민간에서 독립적인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르프만은 “미국인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각과 성찰의 시간이 된다면, 그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라는 말로 기고문의 끝을 맺었다.
칠레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아리엘 도르프만은 1985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듀크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2004년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제국의 낡은 옷>과 <미래에 보내는 편지>등이 있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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