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29일(현지시각) 러시아의 미국 ‘대선개입 해킹’ 의혹에 대한 고강도 보복 조치로 외교관 35명 추방, 미국 내 러시아 공관시설 폐쇄, 해킹 관련 기관과 개인에 대한 경제제재를 골자로 한 대러시아 제재안을 공식 발표했다. 사진은 이날 미 국무부가 대러시아 외교제재 일환으로 워싱턴 DC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러시아대사관과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35명의 외교관을 추방 조치한 가운데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총영사관 건물에 러시아 국기가 반기로 게양된 모습. 샌프란시스코/AFP 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미 대선 해킹 개입 의혹과 관련해, 외교관 35명의 추방을 비롯한 전례없는 고강도 대응 조처를 단행했다. 러시아도 이에 맞서 보복 의사를 밝혀, 양국간 긴장이 최고조로 치솟고 있다. 다만, ‘친 러시아’적 성향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다음달 20일 취임하면 긴장 수위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각) 러시아 외교관 35명에 대해 외교상 기피인물을 뜻하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선언했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 72시간 안에 미국을 떠나야 하는, 강력한 외교적 조처다. 미 언론들은 이들이 외교관 신분을 가장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또 뉴욕과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러시아 정부 소유의 시설 2곳도 폐쇄시켰다. 원래 이곳은 ‘다차’(휴양시설)이지만, 러시아가 이들 시설을 정보수집 활동 장소로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미 재무부는 이날 해킹 배후로 지목된 러시아군 총정보국과 러시아연방보안국(FSB) 등 러시아 정보기관 2곳, 해킹 지원활동에 연루된 특별기술센터 등 기업 3곳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외에 이고르 발렌티노비치 총정보국 국장 등 개인 6명에 대해서도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들은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으로의 여행도 금지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이런 해킹은 최고위층 지시로만 이뤄질 수 있다”며 사실상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배후로 지목했다. 그는 또 “이번 조처들이 대응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밝혀, 상호주의에 입각한 은밀한 보복 해킹을 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외교관 35명 추방은 상징성이 워낙 커 러시아 정부로서도 맞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러시아는 해킹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해왔다. 푸틴 대통령의 대변인인 드미트리 레스코프도 이날 기자들에게 “이번 조처는 오바마 행정부의 예측불가능하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한 뒤 “보복 조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엔엔>(CNN)은 미 당국자를 인용해 러시아 정부가 모스크바에 있는 영미식 국제학교에 폐교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광범위한 대응 조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원칙적 측면 외에도 여론 영향도 크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미 국방부는 공공연히 러시아를 ‘제1의 주적’으로 삼아 경계감이 높아졌다. 더욱이 민주당 소속인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의 대선 개입 해킹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않고 임기를 마치기 어려운 여론구조다. 러시아에 지나치게 우호적 행보를 보이는 차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견제, 러시아에 대한 경고 성격도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냉전의 데자뷔’처럼 보이지만, 러시아와 관계개선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트럼프가 취임하면, 강대 강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도 이런 트럼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9일(현지시각) 문이 닫힌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총영사관 건물 앞. 샌프란시스코/AFP 연합뉴스
폭로전문 매체인 ‘위키리크스’가 지난 7월과 10월, 각각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주요 인사들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 캠프의 선대본부장인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 수만 건을 해킹해 공개하면서 러시아 해킹 배후설이 떠올랐다.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를 당선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킹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은, 중앙정보국(CIA)이 최근 같은 결론을 내리면서 ‘사실’로 굳어졌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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