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보트 10신] ‘체르노빌 어린이’ 치료 쿠바 카라라 요양원

1986년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사고로 인한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크라이나 피폭자 2세들이 지난달 29일 쿠바 아바나 외곽의 카라라 요양원에서 적외선 치료를 받고 있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는 등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은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뒤 머리카락도 조금씩 자라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아바나/이정용 기자 [e-mail]

‘카리브 바다빛’ 사랑… 16년간 2만명에 밀물

쿠바 아바나 동쪽 카라라 해변에 맞닿아 있는 어린이 요양원에 먼동이 터 오른다. 오전 7시가 넘어서자 진료소로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머리가 벗겨진 아이들의 눈동자는 카리브해의 짙푸른 빛깔을 닮아 있다. 간호사가 머리에 ‘태반 크림’을 발라주자 아이들은 익숙한 솜씨로 적외선 치료기를 켠 뒤, 주황색 전등 불 아래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43개의 주거용 방갈로와 병원, 특별 진료센터와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는 이 곳에는 현재 146명의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머물고 있다.

카라라요양원 근처 해변에서 한 어린이가 사랑의 표시인 하트를 그려보이고 있다 .

1986년 4월26일 새벽 1시23분께 옛 소련 땅 우크라이나에서 사상 최악의 원자로 사고가 벌어졌다. 수도 키에프에서 북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체르노빌에 있는 4기의 원자로 가운데 하나가 폭발한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300배나 되는 방사능이 유출됐다. 12만5천여명이 방사능 피폭에 따른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300만명 이상이 각종 질환을 앓고 있다.

1990년 3월부터 쿠바 정부는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체르노빌 아이들’ 지원사업 나서 이들을 카라라 요양원으로 불러 들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카리브해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꽃을 피운다. 한 해 평균 800~900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찾아 짧게는 45일에서 길게는 2~3년 동안 머물며 치료와 요양을 통해 건강을 되찾고 있다.

우크라이나 북부 출신 아르투르 루츠코프(4)는 카라라 요양소에 온 지 한 달째라고 했다. 한 올도 없던 머리카락이 매일 아침 15분씩 ‘광선치료’를 받은 뒤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표정도 더 없이 밝아졌다. 그의 어머니 엘레나 토프카는 “1년 여 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뒤 침울해 하던 아이가 이곳에 온 뒤 명랑해졌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지난달 29일 쿠바 아바나 외곽의 카라라요양원에서 적외선치료를 받고 있다.

제니아 로렌티 요양원 부원장은 “아이들이 도착하면 우선 1주일 동안 종합적인 검진을 받게 된다”며 “건강 상태에 따라 아이들을 4모듬으로 나눠 각자에게 맞는 치료를 해준다”고 말했다. 그 동안 요양원을 거쳐간 아이들 가운데 3% 가량은 백혈병과 각종 혈액종양을 앓고 있었다.

갑상선 비대증이나 신장 기능 이상 등 입원치료가 필요한 17% 가량의 아이들은 평균 6개월 정도 머물며 치료와 요양을 병행한다.

지금까지 모두 117명이 종양 수술을 받았고, 6명이 골수 이식수술로 건강을 되찾았다. 로렌티 부원장은 “이밖에 60% 정도는 탈모증이나 백반증 등 가벼운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로 카라라 요양원에서 머물며 필요할 경우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며 “나머지 20%의 건강한 아이들은 45일 동안 머물며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게 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자스라프스키(22)는 지난 1993년 카라라 요양원에 온 뒤 이제껏 머물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갓 3살을 넘겼던 그는 혼자 힘으로는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고 했다. 지난 12년 세월 동안 수술을 잇따라 받은 그는 2년 전부터 조금씩 발걸음을 떼고 있다. 자스라프스키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처음에는 한번에 알약을 68개나 먹어야 했지만, 요즘은 불과 6개면 족하다”며 “언젠가 건강해져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쿠바의 ‘체르노빌 어린이’ 지원 프로그램은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의약품과 의료장비 부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지난 16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카라라 요양원을 거쳐간 아이들은 1만7943명에 이른다.

피스보트에 탑승한 각 나라 평화운동가들이 지난달 28일 카라라요양원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있다.

지난달 28일 체르노빌 방사능 피폭자들이 있는 쿠바 아바나 인근의 카라라요양원을 방문한 피스보트 승객들이 이곳의 어린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치료 받는 카라라요양원의 적외선 치료실. 어린이들은 새벽 7시부터 오후 8시 사이에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한 어린이가 10월29일 치료를 받던 중 엄마의 품에 안겨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하바나/글 정인환 기자 [e-mail] 사진 이정용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