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덜레스 공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난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나온 자슈어 레이(39) 목사가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딸과 함께 “당신들은 우리의 이웃”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지난 28일부터 시작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난민 행정명령’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3일째 이어지고 있다. 행정명령이 명시한 이슬람 7개국 국민들의 입국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공항에서 거절되기 때문에, 미 전역에서 열리는 시위는 뉴욕 존에프 케네디 공항, 시카고 오헤어 공항 등 각 도시의 국제공항이 주요 무대가 되고 있다. 워싱턴의 국제공항은 인근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덜레스에 있다.
30일(현지시각) 오후 3시, 덜레스 국제공항 1층 국제선 출국장에는 100여명의 ‘반이민 행정명령’ 시위대가 모여 세관 및 입국 심사를 마친 승객들이 나올 때마다 박수를 치며 “웰컴 투 유에스에이(USA), 웰컴 투 워싱턴”을 외쳤다.
무슬림으로 보이는 이가 출국장으로 나올 때면 시위대의 박수소리는 더욱 커졌다. 히잡을 쓴 한 여성은 ‘탑승 과정에서 고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나는 (회교국가인) 방글라데시아에서 출발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환승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 뉴스를 듣고 혹시 입국을 거절당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오는 미국인 승객들도 20m가량의 ‘환영 인파’ 터널을 지날 때 손을 흔들며 호응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는 시위를 이끄는 리더나 뚜렷한 주최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인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시위처럼 보였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자 마분지나 색종이 손팻말에 다양한 구호를 적어 놓았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전파하자”, “무슬림이 아니라 트럼프를 입국금지시키자”, “자유의 땅, 친구들을 환영한다”, “트럼프의 여행금지를 엎어버리자” 등의 글귀가 눈에 띄었다.
이날 덜레스 공항 시위대 중에는 ‘반이민 행정명령’의 표적이 되고 있는 무슬림이나, 트럼프가 틈날 때마다 거론하는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또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 다만 이들은 트럼프처럼 무슬림에 배타적인 근본주의적인 극우 기독교도와는 전혀 다른 인도주의적 신념으로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딸과 함께 이날 시위에 참석한 백인 목사인 자슈어 레이(39)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두가지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무슬림은 우리의 이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는 미국을 사랑하지만,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트럼프의 각종 잘못에도 침묵하던 교인들도 이번 행정명령에 대해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나 낙태 문제 등에 전향적인 민주당에 반대하는 경향이 짙다. 이번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이런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도 지지를 못 받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댄이라고만 밝힌 한 중년 남성은 자신도 기독교인이라며, “우리는 특정 종교를 표적으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것(반이민·난민 행정명령)은 종교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문제다. 연민의 문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30일(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덜레스 공항에서 트럼프의 행정명령으로 구금되거나 추방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항에서 무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로 나선 캐서린 곤잘레스 변호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으로 인해 공항에서 곧바로 구금되거나 추방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현장에서 곧바로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나선 변호사도 시위대에 포함돼 있었다. 캐서린 곤잘레스 변호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국적이나 종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위헌적인 일을 할 순 없다”고 지적했다. 곤잘레스는 트럼프가 이날 트위터를 통해 ‘겨우 109명이 억류돼 심사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겨우 109명이 불편을 당했다고? 그들은 가족과 이별해야 했고, 몇몇 사람들의 삶들은 황폐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시위대의 누군가가 미국의 ‘제2국가’로 사랑받는 우디 거스리의 노래인 ‘이 땅은 여러분의 땅’을 부르기 시작했다. 거스리는 노래로 파시즘에 반대하며, 1940년대 당시부터 이주노동자 등 약자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그들과 연대했고, 60년대 민권운동 시절 밥 딜런, 존 바에즈 등이 거스리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이 노래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 피트 시거 등이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선창이 점점 번져 합창으로 이어지고, 포용의 메시지를 담은 노랫가락과 선율이 덜레스 공항에 가득 찼다.
덜레스(버지니아주)/글·사진 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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