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1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자리한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당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뒤가 13일 사임한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팜비치/AFP 연합뉴스
마이클 플린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전격 사임은 취임 전부터 구설에 오르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난맥상을 확인한 사건이다. 미국 정보·수사 당국들은 플린의 부적절한 러시아 접촉을 파악하고 경고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이를 애써 무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플린이 수장인 외교안보팀뿐만 아니라 백악관 전체의 혼돈으로 이어져, 내부 갈등으로 번졌다.
■ 플린이 사임하기까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던 플린은 2013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 대사를 처음 만났다. 국방정보국장에 사임한 그는 지난해 중반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으로 발탁된 뒤 키슬랴크와 전화, 문자메시지, 만남 등으로 계속 접촉했다. 두 사람의 접촉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난해 11월8일 이후에도 지속됐다. 키슬랴크는 미국 정보·수사당국의 감시대상이어서 두 사람의 접촉은 감시됐다.
오바마 전 행정부는 지난 12월29일 러시아 쪽이 민주당 전국위 서버를 해킹하는 등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러시아 제재를 발표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를 부인하면서도 대응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트럼프 당선자는 이를 칭찬했다. 미 정보분석가들을 러시아의 대응에 의혹을 갖고는 키슬랴크의 통화기록들을 분석했다.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그 후 도청을 통해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확인하고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두 사람 통화의 주요 내용은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문제였다.
샐리 예이츠 당시 법무장관 대행은 플린의 통화 내용이 “아주 중요하고” “잠재적으로 불법적”이라고 판단했다. 예이츠뿐만 아니라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CIA) 국장,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도 플린이 민간인의 외교 사안 관여를 금지한 로건법을 위반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가 1월12일 ‘플린은 무엇을 말했고, 이는 미국의 제재를 약화시키나?’라는 칼럼을 쓰면서 문제는 불거졌다. 다음날 백악관 대변인으로 내정된 숀 스파이서는 두 사람의 대화는 트럼프의 취임 이후 푸틴과의 통화를 위한 실행계획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해명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자도 15일 방송에 출연해 플린이 자신에게 설명한 내용을 전하며 두 사람의 접촉에서 제재와 관련해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펜스가 사실과 다르게 공식 해명하자, 수사 당국은 러시아가 이를 이용해 플린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마지막 날인 1월19일 예이츠, 클래퍼, 브레넌 등 수사·정보기관 책임자들은 트럼프 신임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장은 보고를 하게되면, 향후 수사에 차질을 빚는다고 반대했다. 1월23일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 첫 언론 브리핑에서 플린은 키슬랴크와 통화를 단 한번만 했고, 의례적인 얘기만 나눴다고 자신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이에 코미 연방수사국장도 백악관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자는 예이츠의 주장에 동의했고, 도널드 맥간 백악관 고문에게 보고됐다. 예이츠는 플린이 키슬랴크와의 접촉에 대해 행정부 고위 관리들을 오도하고 있고, 그가 러시아의 공갈에 잠재적으로 취약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취임 직후부터 플린의 백악관 내 입지가 취약하다는 소문이 돌았고, 트럼프 대통령은 플린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2월8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플린은 자신의 혐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했다가, 하루 뒤에는 러시아 제재 논의라는 “의제가 나오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물러섰다. 파문이 확산되자, 켈리엔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13일 오후 트럼프는 플린에 “전폭적 신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분 뒤 스파이서 대변인은 “대통령은 이 상황을 평가하고 있다”는 정반대의 논평을 냈다. 이날 밤 플린은 사직을 발표했다.
■ 플린, 무엇을 거래했나 플린은 키슬랴크 러시아 대사와의 접촉에서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해제를 논의한 것은 분명하나, 이를 약속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로서는 아직 민간인 신분인 플린이 단순히 정책을 논의하는 것도 엄청난 의전 위배인데, 그는 미국의 잠재적인 적인 러시아의 우려를 완화시키려는 명백한 기도를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접촉 내용을 부통령에게까지 거짓말을 한 것은 국가안보를 크게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지적이다. 접촉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러시아 쪽이 플린에게 다른 것을 원한다면, 그를 협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취임 전부터 논란을 부른 플린의 러시아 커넥션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플린은 2015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연설을 했다. 퇴역한 군인이 의회의 허락없이는 외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게 한 헌법 조항을 어긴 것이다. 미 육군은 현재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플린의 사임은 트럼프 대통령 본인을 둘러싼 러시아 커넥션 의혹을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에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호텔에서 부적절한 성접대를 받았고, 이를 러시아 정보기관이 동영상을 찍어 갖고 있다는 사설 정보보고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트럼프 본인을 포함해 공직과 사익 사이의 이해충돌부터 시작해 각종 윤리적 문제가 제기됐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트럼프 행정부에서 플린이 사임한 것은 더 심각한 사안이 이번 사태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도 낳고 있다.
미국 외교안보의 사령탑인 안보보좌관이 취임 한달도 안돼 결국 낙마함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더욱 혼돈에 빠지게 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