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16일 워싱턴의 의회에서 열린 오찬 행사에 나란히 앉아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벌여온 반대 세력과의 싸움이 변곡점으로 치닫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신을 도청했다고 주장한 것과 행정부 예산 등을 놓고, 집권 공화당 내부에서도 격렬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공화당의 최고위 인사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상·하원 정보위의 양당 지도부는 일제히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신을 도청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리처드 버 상원 정보위원장과 민주당 간사인 마크 워너 의원은 16일 성명을 내고 “우리가 가진 정보에 근거하면, 트럼프 타워가 2016년 대선 선거일 전후에 어떠한 미국 정부기관의 감시 대상이 됐다는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전날 데빈 누네스 하원 정보위원장과 민주당 간사 아담 스키프 의원도 성명을 내고 같은 의견을 밝혔다.
라이언 하원의장도 이날 이날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의 주장과 관련해 상·하원 정보위에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적어도 우리 정보당국과 관련해선 그런 도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의회 전체가 트럼프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하지만,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의 주장을 계속 고수하며, 영국 정보기관의 도청 도움설까지 끄집어냈다. 그는 이날 브리핑에서 “상·하원의 조사가 모든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다”며 현재 조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영국 감청정보기관인 정부통신본부(GCHQ)가 트럼프 쪽에 대한 도·감청을 도왔다는 언론 기사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보통신본부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완전히 웃기는 주장이며, 무시돼야 한다”고 일축했다.
앞서 사법전문가 앤드류 나폴리타노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정부통신본부를 이용해 트럼프를 사찰해, “이 사건에서 미국의 흔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쪽은 궁지에 몰리자, 외국 정보기관 개입설까지 주장해, 이 사건의 파장을 더욱 키운 셈이다.
당파를 초월한 의회의 반박에 직면한 트럼프의 도청 주장은 트럼프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하원 정보위는 트럼프 자신이 이 주장을 철회하거나 법무부가 관련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법무부와 관련 기관을 상대로 강제 조사를 하겠다고 경고한 상태이다. 법무부는 관련 자료 제출시한인 13일을 못지켜, 20일로 시한을 연장받았다.
하지만, 법무부나 정보 수사기관이 관련 증거를 제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트럼프의 주장이 근거없다는 것을 법무부가 공개 표명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연방수사국 등 정보 수사기관들은 트럼프의 주장이 자신들의 신뢰를 해치는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안보 분야의 예산을 대폭 늘리고 나머지 민생 분야 예산을 삭감한 트럼프 예산안도 공화당 내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비등하다.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며, 트럼프 예산안이 뼈대가 유지된 채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한 축인 티파티 계열의 ‘하원 프리덤 코커스’ 의원 등 당내 강경보수 세력은 트럼프 예산안이 재정적자 축소 효과가 전혀 없다며,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대폭 삭감을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예산안은 민생 분야 예산을 대폭 축소하기는 했으나,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강화를 약속한 공공퇴직연금(소셜시큐리티)과 취약층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는 그대로 뒀다.
반면, 공화당 내 온건보수 의원들은 민생 분야 예산 삭감으로 트럼프의 지지층인 내륙의 산업쇠락지대(러스트 벨트)의 취약층만 피해를 본다고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또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 등 국방 매파들은 국방비 증액이 충분하지 않다고 추가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예산안을 둘러싼 공화당 내의 분열은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인 오바마케어를 대체하려고 발의된 ‘미국건강보험법안’을 놓고도 고스란히 재연중이다. 강경보수들은 미국건강보험법안이 오바마케어를 완전히 폐지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온건 보수들은 오바마케어의 혜택을 존치해야 한다고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 내린 무슬림 6개국 출신자 입국 제한 행정명령은 법원에 의해 계속 제지되고 있다. 하와이 연방지법이 2차 반이민 행정명령의 효력을 전국적으로 한시 중단하는 결정을 내린데 이어, 발효일인 16일에도 메릴랜드 연방지법이 그 효력을 임시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두 차례 걸쳐 시도한 무슬림 국가 출신자 입국 제한 조처는 계속 효력을 발효하지 못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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