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현지시각) 미국 하원에서 미국보건법 표결이 무산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진했던 미국보건법(AHCA·트럼프케어)이 하원 표결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좌초됐다. 트럼프의 반이민·난민 행정명령이 법원에서 제동이 걸린 데 이어, 그가 선거 전부터 ‘제1호 폐기 대상’으로 공격해온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 역시 공화당 내부 분열로 결국 살아남게 되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고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공화당 우위의 상·하원에도 불구하고 24일로 예정했던 트럼프케어 입법안 하원 표결조차 포기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 두달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 외신들이 전했다. 반이민·난민 행정명령, 건강보험개혁 등 취임 초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한 국정 과제가 법원과 의회에 줄줄이 발목 잡히고, 최근 미 연방수사국(FBI)이 트럼프 캠프의 ‘러시아 게이트’ 의혹에 대해 공식적으로 수사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정부는 내우외환에 빠진 모습이다. 특히 트럼프가 추후 입법 과제로 꼽은 세제개편안이나 사회기반시설 투자계획도 트럼프케어 예산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번 표결 무산은 앞으로의 국정 과제 추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표결 무산은 강경 보수파 공화당 의원 30여명이 소속된 ‘프리덤 코커스’를 끝내 설득하지 못한 것이 주요 패인으로 꼽힌다. 애초 23일로 예정됐던 미국보건법 하원 표결은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하루 뒤인 24일로 연기됐으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는 이날까지도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을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언 의장은 표결 직전 백악관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반 지지 확보에 실패했다고 보고했고, 부결이 확실한 만큼 대통령의 자진 철회를 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라이언 의장과의 독대 직후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등의 백악관 담당 기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표결을 철회했다”고 밝힌 데 이어, 기자회견에서도 “앞으로는 내가 항상 좋아해온 세제개혁 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히면서 트럼프케어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라이언 의장 역시 “오바마케어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때까지 당분간 법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케어 표결이 무산되면서, 트럼프가 추진하겠다고 밝힌 세제개편안이나 1조달러(약 1122조원) 규모의 사회기반시설 투자계획 역시 의회의 동의를 받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세제개편안에서 법인세율을 기존 35%에서 15% 수준으로 낮추고, 개인소득세 과세율도 단순화하거나 낮춘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세제개편안이 상·하원을 통과해 시행될 경우 향후 10년간 누계 재정적자가 최대 7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케어 폐지·국경세 신설을 통해 절약한 세수로 이를 메꾼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트럼프케어가 좌초하면서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세제개편안의 최대 쟁점인 ‘국경세’ 신설에 대한 논란이 커지는 것도 트럼프에겐 부담이다. 트럼프는 미국 수입품에는 관세를 물리고 수출품에는 면세 혜택을 주는 국경세 신설을 통해 최소 1조달러의 신규 세수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지만, 유럽연합(EU)을 비롯한 교역 상대국들은 이런 조처가 불공정 무역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미 의회에서도 국경세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 의회 통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톰 콜 하원의원(공화·오클라호마)은 “(트럼프케어에 대해) 공화당 의원들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컸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 밖(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아웃사이더’ 대통령으로 남을지, 안정적 정국 운영을 위해 다른 길을 찾을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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